변혁기(1966-1978)
1966 선교적 침체와 교단 조직의 변혁
1966년 7월 <교회지남>에는 1만5천 명이 안교생수가 감소한 사실에 대한 우려와 각성을 호소하는 글이 게재되었다. 안교생수는 1965년 9월에 10만을 넘어선 것을 정점으로 이후 줄기 시작했는데, 1966년 6월 통계에서 1만5천 명이 감소했고, 1967년 6월말에는 34,330명으로 급감했다. 1년 6개월만에 6만 명 이상의 안교생수가 감소된 것은 구호봉사회의 구호 사업을 개혁한 결과였다. 한국연합회는 1967년 9월에 제23회 총회를 개최한 후 조직 축소를 단행했다.
우선 경북대회와 경남대회는 다시 영남대회로 통합되었다. 1968년 1월에는 중한대회와 중동대회를 다시 중한대회로 통합하였고, 중서대회와 호남대회를 서남대회로 통합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국 지방대회는 3개 대회(중한대회, 영남대회, 서남대회) 체계로 축소되었다.
한국연합회는 조직 축소와 더불어 사역자 감원을 추진하여 50명 이상의 목회자와 교역자를 감원하였다. 그리고 안교생수의 급격한 감소의 원인을 찾아서 분교생수를 통계에서 제거하는 제도적 보완을 추진하여 안교생수의 급격한 감소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연합회는 이런 조직 및 제도개편과 신앙정신 회복운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67. 3월 1일
삼육신학대학이
삼육대학으로 개칭됨
1967년 3월 1일부터 삼육신학대학은 삼육대학으로 운영되었다. 학교법인 삼육학원은 1961년 2월 정교 4년제 대학으로 삼육신학대학을 인가받은 후, 1962년 3월 1일부로 삼육실업초급대학 설립 인가를 받고 농업과와 가정과를 운영하였다.
1966년 들어서 대학 지도자들은 삼육실업초급대학을 폐지하고 농업과와 가정과를 4년제로 전환하는 것으로 고등교육 정책의 변화를 계획했다. 아울러 삼육신학대학을 삼육대학으로 개칭하는 안을 마련하여 정부에 인가 신청을 하여 1966년 12월 21일자로 명칭 변경 및 학과 개설 인가를 받았다.
이런 과정을 토대로 1967년 3월 1일부로 삼육신학대학은 삼육대학이 되었고, 학과도 신학과에 이어 농업교육과와 가정교육과를 신설하였다. 각 학과의 정원은 신학과가 50명, 농업교육과와 가정교육과가 각각 30명이었다.
삼육대학은 4년제 일반대학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입학정원은 110명이 되었다. 이후 새로운 학과들이 계속 신설되었는데, 1968년에 영어영문학과, 1974년에 간호학과가 각각 신설되었다. 한편 1973년 12월 19일에 삼육기술전문학교를 인가받았고, 간호학교도 위생간호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1969. 9월 29일 삼육영어학원 개원
교회가 선교적 침체기를 겪고 있을 때, 한국 재림교회는 영어학원 사업을 통해서 새로운 변혁을 추구하였다. 영어학원 사업은 1966년 일본 오사카에서 배스캄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매우 성공적인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에 한국연합회도 1969년 4월에 행정위원회에서 서울에 삼육영어학원을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이 시기에 한국 사회는 수출 장려 정택으로 해외 통상 규모가 늘어났고, 10억불 수출 실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영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였다. 한국연합회는 학원 설립 결의 후 청량리 대왕코너 7층에 학원 건물을 구입하고 9월 22일에 삼육영어학원을 시작했다. 초대 학원장에는 딘 허바드 목사가 임명되었다. 삼육영어학원은 원어민 영어회화 전문학원을 표방하여, 교사 전원을 원어민으로 확보하였다. 원어민 교사는 미국 재림교회가 전개한 대학생선교사 운동과 연계하여 확보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삼육영어학원은 개원 첫 등록부터 성황을 이루어 지속적으로 발전하였고, 학원을 담당하는 목회자들은 성경연구반(Bible Class)를 구성하여 학원 사업을 선교와 접목시켰다. 지방 학원은 부산(1971), 광주(1973)에 개원되었다.
1970. 11월 24일 ~ 28일
한국연합회 제24회 총회 개최,
본방인 중심의 지도력 구축
1970년 11월 24일부터 28일까지 한국연합회 제24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서울위생병원의 정사영 의사는 선교사 의존도 축소 및 행정권의 본방인 이양에 관한 개의안을 발의했다.
이 개의안이 발의된 이유는 1968년부터 시작된 서울위생병원 신축 과정에서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하여 그 사업을 주도한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임 논란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총회에 참석한 한국인 대표자들은 연합회 임원들을 본방인으로 선출해 달라는 요청을 원동지의 임원들에게 제안하여 한국연합회의 각부 부장과 기관장들이 모두 한국인으로 선출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아울러 1971년 11월에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원동지회 총회에서 한국연합회 회장에 김이열 목사, 서기에 임병의 목사가 임명됨에 따라 재무(J. L. 위글)을 제외한 임원 및 부장 전원이 본방인들로 구성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본방인 체계를 구축한 것에 비해서는 늦었지만 한국 재림교회도 본방인 중심의 지도력을 갖춤에 따라 자양 조직으로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확립할 수 있었다.
1971. 12월 8일
시기파 등장과
시한부 종말론 운동
1960년대 후반부터 1971년까지 한국 재림교회 안에서는 시기파의 등장과 더불어 시한부 종말론 운동이 전개되었다.
원래 이 운동은 1964년 종말론에서 시작되었다. 일부의 재림교인들은 노아가 방주를 지은 기간을 예언에 적용하여 1844년 이후로 120년이 지나는 1964년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해에 재림이 성취되지 않자 방주에 들어간 후 비가오기까지 7일의 기간을 연일원칙에 적용해 7년 후인 1971년에 재림이 성취된다고 다시 가르치면서 시기파를 결성했다.
강태봉, 전혜심, 정창순 등의 지도 아래 시기파는 1968년 4월 18일부터 22일까지 경기도 대월면 도리리 야산에 사람들을 모아 재림의 시기를 선포하고 입산 운동을 장려했다.
이들은 1964년에서 1971년 사이의 절반에 해당하는 1968년 4월 12일에 미국 의회에서 민권법이 통과된 사건에 주목하고, 그 때로부터 1335일(단 12:12)째 되는 1971년 12월 8일에 예수께서 재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기파와 입산파의 시한부 종말운동은 실패했고, 그 후 정금배 등의 지도 아래 개혁파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1974. 11월 30일 선교 70주년 기념예배
1974년는 한국 재림교회 선교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1970년대 들어서서 교회가 다시 성장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그 요인 중에는 평신도들의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청암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한 추상욱 교장의 교육 및 선교 사업이 주목을 받았다. 전라도 광주에서는 남선연탄주식회사를 운영하던 김용기 사장이 남선교회를 설립하고 광주 선교에 기여한 내용이 주목을 받았다.
서울에서는 청암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한 추상욱 교장의 교육 및 선교 사업이 주목을 받았다. 전라도 광주에서는 남선연탄주식회사를 운영하던 김용기 사장이 남선교회를 설립하고 광주 선교에 기여한 내용이 주목을 받았다.
이 기념 예배에는 서울특별시 제1부시장이었던 남문희 씨가 정부 측 대표로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고, 정일권 국회의장은 <교회지남> 11월호에 축사를 기고하여 한국 재림교회의 발전을 치하하며, 사회적 역할을 당부하였다.
이 시기에 한국 사회는 민청학련 사건, 육영수 여사 피습 사건 등이 발생하는 등 혼란한 상황이었지만 한국 재림교회는 선교 70주년을 기념하면서 선교 일념으로 전진하면서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을 다짐했다.
1976. 7월 16일
서울위생병원 확장
신축공사 준공식 거행
서울위생병원은 서울위생병원 신축 공사를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하고 1976년 7월 16일에 준공식을 거행했다. 1967년에 조지 루 병원장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새로 책임을 맡은 병원장과 총무는 연합회와 연합해서 1968년부터 병원 신축 공사를 시작했다.
이 신축 과정에서 저조한 공사진행률과 예산 초과 등의 문제로 논란이 발생하였다. 서울위생병원 이사회는 1972년 12월에 “병원 당면문제 연구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습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 수습 방안의 일환으로 병원장을 이근화 의사로 교체하고, 감사 기구를 신설하였으며, 신관 건축위원회를 다시 구성하였다.
새로운 건축위원회는 1974년 3월부터 중단되었던 병원 건축을 재개하여 1976년 7월에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병원 신축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부지 매각, 은행 융자 등을 통한 많은 재정이 소요되어 신축 공사 부정 의혹 등이 발생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혼란이 있었지만 모든 문제를 정리하고 준공식을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