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진기(1955-1965)
1956. 1월 예언의 소리 방송부 설립
한국전쟁으로 인한 교회의 피해 상황을 복구하고 재건의 시기를 보낸 한국 재림교회는 1956년 들어서서 경제적 자립과 본방인 중심의 지도력을 확대하는 등 자급역량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1956년 1월에 예언의 소리 방송부를 설립하고 방송사업을 추진하였다. 한국연합회는 제임스 리를 위원장에 임명한 후 정사영 박사의 도움으로 서울중앙벙송국(HLKA)으로부터 방송 설교 시간을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예언의 소리 방송부는 1월 셋째 주 일요일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오전 6:30~45분까지 설교 방송을 시작하였다. 세계 재림교회의 방송 선교는 1930년에 리차즈가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KGER 방송국에서 “공중의 성전"을 시작한 것이 효시였다.
이 방송은 패시픽 연합회에 의해 “예언의 소리“ 방송으로 명명되어 운영되었다. 한국에서도 이 사업이 시작되자 리차즈 목사가 1956년 12월에 내한해 라디오 방송을 지원하였다. 한국연합회는 1957년 12월에 제18회 총회에서 먼슨 목사를 라디오부장에 임명하였다.
1957. 12월
한국연합회 제18회 총회에서
중동대회 신설 (4개 대회 체계)
1957년 12월에 개최된 한국연합회 제18회 총회에서는 대회 조직을 확장하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한국연합회는 1953년부터 북한을 제외한 남한 지역을 중한대회, 영남대회, 호남대회로 분할해서 3개 대회 제계로 운영하였다.
이중 중한대회는 서울, 경기, 강원, 충청을 관할하고 있어 그 지리적인 여건이 광범위했다. 1957년에 이르러 교세가 확장되자 한국연합회는 제18회 총회에서 중한대회를 중한대회에서 중동대회를 분리하였다.
중동대회는 원주를 본부로 하여 강원도 전역과 충청도의 제천과 단양을 선교 관할 지역으로 하는 조직이었다. 이로써 한국연합회는 중한대회, 중동대회, 영남대회, 호남대회로 나누는 지역 조직을 갖추었다.
1960년대 들어서 교세는 더욱 확장하였고, 특별히 중한대회의 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다.
1962년 12월에 한국연합회 행정위원회에서는 중한대회의 사업 확장에 따른 관할 지역이 비대함에 따라서 대회 분리를 논의하여 중한대회에서 중서대회를 또 분리하였다. 이로써 중한대회는 서울과 경기도, 중서대회는 충청남북도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연합회는 5개 대회 체계를 구축하였다.
> 1963. 11. 01. 중서대회 신설(5개 대회 체계)
1958. 8월 31일
구호봉사회가 한미구호협정에
따른 구호단체로 선정
한국전쟁 이후 교단의 복구 및 재건 사업을 마친 한국 재림교회는 전국적인 구호 사역에 집중했다. 한국전쟁 직후에 구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성원 목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던 한국연합회는 1952년 5월에 개최된 제16회 총회에서 오영섭 목사를 구제위원장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1957년 12월에 개최된 제18회 총회에서는 한국연합회장이 구제위원장을 겸직하도록 결의하여 이 사업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월드 비전과 기독교 세계봉사회가 한국위원회를 조직하고 공식 구호 단체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연합회도 구제위원회를 1958년 8월 31일에 구호봉사회로 바꾸고 한미민간구호협정에 따른 국내 10개 구호 단체 중 하나로 선정되어 본격적인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연합회 구호봉사회는 대총회가 1956년에 조직한 재림교회 구호봉사회의 조직에 부합하는 구호 조직이었고, 이를 통해 대총회로부터 원조를 받아 한국의 전 지역으로 구호 물품을 전달하는 구호봉사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한국연합회는 구호봉사 사업으로 인해 선교적으로도 놀라운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삼육고등학교 설립 인가
- 1958. 11. 23. 호남삼육서울고등학교 설립인가
- 1959. 2. 28. 영남삼육고등학교 설립인가
- 1961. 12. 7. 서울삼육고등학교 설립인가
- 1963. 3. 16. 한국삼육고등학교 교명 변경
- 1963. 12. 12. 광천실업고등학교 설립인가
- 1964 원주삼육고등학교 설립인가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에 대전삼육중학교(4월 1일), 묵호삼육중학교(5월 6일), 영남삼육중학교(12월 12일), 서울삼육중학교(12월 12일)이 개교되었고, 1953년에는 호남삼육중학교(4울 20일), 광찬삼육중학교(5월 1일)이 개교되었다.
그 후 1958년부터 지방에 여러 고등학교가 개교되었다. 호남합회에 소속된 호남삼육고등학교는 1958년 11월 23일에 설립인가를 받고 광주시에서 고등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영남합회에 소속된 영남삼육고등학교는 1959년 2월 28일에 설립 인가를 받고 경산에서 교육을 시작하였다. 서울삼육고등학교는 1961년 12월 7일에 설립인가를 받고 구리에서 교육을 시작하였다. 한국삼육고등학교는 1963년 3월 16일에 교명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중서합회는 1963년 12월 12일에 광천에 광천실업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고등학교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중동대회도 1964년에 대회 본부가 있는 원주에서 삼육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고등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1981년 11월 25일에 동해삼육고등학교가 설립인가를 받고 교육사업을 시작해 한국연합회는 총 7개의 고등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1961. 2월 2일 삼육신학대학 설립인가
1961년에 삼육신학원은 4년제 정규 신학대학인 삼육신학대학으로 정식 인가를 받고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54년 7월에 인가를 받았던 삼육신학원은 정규 대학이 아니라 각종 학교로 인가를 받은 것이었다.
삼육신학원의 교육 체계가 고도화됨에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4년제 대학으로서 신학대학 인가를 바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우선 교실 등 각조 시설들을 세우고, 정부 인가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학사 제도와 학칙 등을 정비하였다. 과학관, 의무술, 도서실, 예배당 등 부대 시설들도 증축하였다.
아울러 대총회로부터 대학 설립 인가를 추진하였다. 대총회는 1928년부터 “재림교회 대학평의원회"에서 대학 설립을 인가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육신학원은 대총회 인가를 신청하였고, 1959년 말에 대총회 교육부장 카존틴 목사가 내한해 삼육신학원의 정규대학 설립을 승인했다.
그후 학교법인 삼육학원은 1960년 1월 5일에 정부에 대학 인가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인가 과정은 1년여의 시간이 지난 후인 1961년 2월 2일에 정식으로 받게 되었고, 삼육신학원은 삼육신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신학과 입학 정원은 200명이었다.
1964. 2월 9일
한국 재림교회 선교 60주년
기념식과 기념 사업(교회사 출간) 진행
1964년은 한국연합회 선교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였다. 한국전쟁 이후 구호봉사 활동 등을 통해서 놀라운 성장을 경험한 한국 재림교회는 2월 2일부터 9일까지 본부교회 예배당에서 제21회 총회를 개최하고 선교 6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교회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안교생수 84,881명이라는 보고에서 나타난 것처럼 재림교회가 선교적 약진을 이룩한 것을 자축하였다. 특별히 이 총회에서 전 한국연합회장이자 현 대총회부회장인 왓츠 목사가 내한해 총회를 지도하였고 25명의 목사에게 안수를 베풀어 더욱 더 의미 있었다.
총회 마지막 날에는 선교 60주년 기념식에 진행되었는데, 미국 연합장로회 한국선교부 대표였던 모펫 박사가 초대되어 축사를 했다.
한편 한국연합회는 선교 60주년 기념 사업으로 교회사 출간을 추진하였다. 이 작업은 교회사 교수였던 이영린 목사가 담당하였다. 그는 3년 간의 연구와 집필을 거쳐 1964년 여름에 <한국재림교회사>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1965년 12월 23일에 시조사에서 발행되어 전국 교인들에게 배포되었는데, 한국 기독교계에서 최초로 출판된 교파 단위의 역사책으로 의의가 있었다.
1964. 8월 31일 ~ 10월 31일 삼일당 대전도회 개최
한국 선교60주년을 기념하는 또 하나의 사업으로 진행된 것이 바로 삼일당 전도회였다. 이 전도회는 1964년 8월 31일부터 2개월 동안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되었다.
원동지회와 한국연합회와 중한대회가 연합한 이 전도회는 중앙청 옆 진명여고의 삼일당 강당을 빌려 진행되었다. 이 전도회를 위해 서울 시내에 속한 모든 사역자들과 평신도들이 협력하였다. 전도회를 위해서 전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사전 준비 프로그램도 진행되었다. 서울 시내 모든 교회는 수개월전부터 부흥회와 새벽기도회와 금식기도회를 개최하여 전도회를 준비하였다.
중한대회는 5월 16일부터 19일까지 사역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다락원 YMCA 수양관에서 특별기도회를 가졌다. 홍보는 현수막과 전단지는 물론이고 라디오와 신문을 통한 미디오도 적극 활용했다.
전도회 하루 전인 8월 29일 안식일에는 서울 시민회관에서 합동 헌신예배가 진행되었는데 3천4백 여 명의 교인들이 참석했다. 전도회 기간 중에 매일 1,200여 명이 참석하였고, 전도회가 마쳐진 10월 31일에 서울운동장 수영장에서 155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후에도 침례 행렬이 계속 이어졌다.
1965. 1월 1일 영남대회가 경북대회, 경남대회로 분리됨(6개 대회 체계)
구호 활동과 연합전도회 등 적극적인 선교 활동의 결과로 1965년에 들어서 한국 재림교회는 대약진의 시기를 맞이했다.
이런 놀라운 성장을 반영하여 한국연합회는 영남대회를 경북대회와 경남대회로 분리하기로 결의하고 1965년 1월 1일부터 두 대회를 공식 조직하였다.
이로써 한국연합회는 1963년 1월 1일부터 5대 대회 체계를 구축한 이후 2년 만에 다시 6개 대회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한국연합회는 1965년 12월 27일부터 1966년 1월 2일까지 제22회 총회를 개최했는데, 이 총회 보고서에 나타난 통계에 따르면, 한국 재림교회는 1965년 9월말로 안교생수(100,314명) 10만을 넘어서는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한국 재림교회가 이런 결과를 얻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구제위원회(구호봉사회)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구호 봉사 활동 및 선교활동을 전개한 결과였다. 한국연합회는 이 시점을 정점으로 해서 그 이후 교세가 감소하는 상황으로 반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