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기(1945-1954)
1945. 10월 18일 ~ 24일
전국 신도총회
(조선합회 제 14회 총회) 개최
서울에서 신앙공동체를 이끌었던 두 목사(이성옥, 김석영)가 해방 직후인 8월 17일에 서울 청진동교회를 청소한 후, 다음 날 안식일에 안식일예배를 드렸다. 일요일인 8월 19일에는 13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재림교회를 재건할 것을 결의하고 재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교회 재건을 위한 신도 총회를 계획하고 10월 18일부터 24일까지 회기동 본부교회에서 신도총회를 개최하였다. 조선합회 제14회 총회로 공식 규정된 이 총회에는 북한 지역의 교인들을 포함해 기존의 4개 대회 지역에서 146명이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총회의 전형위원회에서는 조선합회장에 임성원, 서기 겸 회계에 오석영 목사를 선임하였다. 아울러 경영위원회에서는 기관 및 교회 재건사업 이외에도 청소년 자급전도자 양성, 지방 소학교 재건, 신학교 개교, 의과대학 설립 등을 특별 사업으로 결의하였다. 신도 총회 후에 임명된 지도자들은 출판 사업과 의료 사업 기관 환수를 위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46. 3월 13일
조선합회장 왓츠 목사 내한 및
조직 재정비
1945년 11월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원동지회 평의원회에서 조선합회장에 왓츠 목사가 재임명되었다. 왓츠는 1946년 3월 13일에 조선으로 돌아와 4월 7일부터 11일까지 합회 평의원회를 열고 합회장으로 추인을 받았다. 이 평의원회에서는 조선합회를 남한과 북한 지역으로 나누기로 결의하고 남한 지역은 정동심 목사, 북한 지역은 임성원 목사에게 책임을 맡겼다. 이후에 왓츠 목사는 대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동심 목사의 지도 아래 남한 지역은 교회 재건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지만, 임성원 목사가 지도하는 북한 지역의 교회 재건은 쉽지 않았다.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북한 지역 책임자였던 임성원 목사는 1946년 10월 18일부터 일주일간 입성리교회에서 신도대회를 개최하였다. 200여 명의 교인들이 참석한 북한 신도대회에서 북선대회가 조직되었고, 대회장에 임성원 목사, 서기 겸 회계에 송용한 장로가 임명되었다. 북선대회는 평양에 본부를 두고 4명의 사역자를 중심으로 북한 지역의 교회 재건을 추진하였다.
1946. ~ 1947.
선교사들의 재입국 및
기관 사업 재개
본방인 지도자들이 교회 재건 사업을 추진하면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선교사들이 재입국하면서 기관 사업 재개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합회장에 임명된 왓츠 목사는 1947년 1월 12일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합회장 업무를 공식 수행했다. 그는 합회 평의원회를 개최하여 합회 부회장에 정동심 목사, 시조사 총무에 박창욱 목사를 임명했다.
그해 4월 15일에는 조지 루 의사가 입국해 경성요양병원을 정상화시켰다. 그의 지도에 따라 경성요양병원은 5월 7일부터 서울위생병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본격적인 진료 체계를 갖추었다.
제임스 리 목사도 4월 15일에 입국하여 교육사업의 재개를 추진함으로써 9월 1일부터 면목리에서 삼육중학교를 재개했다. 6월 26일에는 왕거린 여사가 입국하여 10월 20일부터 <시조>를 속간하였다. 그녀와 함께 입국한 롭슨은 경성요양병원 간호원장으로 취임했고, 9월부터 간호원 양성소를 다시 개교하였다.
1948. 1월 성경통신학교 사업 추진
해방 후 재입국을 통해 시조사 편집국장의 업무를 계속 맡게 된 테오도라 왕거린은 1948년 1월부터 “예언의 소리 성경통신학교”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던 사업이었다. 미국으로 철수한 후 성경통신학교 사업의 결과를 체험했던 왕거린 여사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이 사업을 한국에서도 추진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영어로 된 성경통신학교 과목들을 한글로 번역했다.
총 30과 분량으로 된 통신학교 과목은 우편으로 발송하고 답안지를 우편으로 받아서 관리한 후 전 과정을 이수하면 수료증을 주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 사업을 위해 조선합회는 시조사 내에 성경통신학교 본부를 설립하여 본격즉으로 통신학교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사업이 활성화되자 1948년 3월에 김규혁 목사를 부책임자로 임명하였고, 6명의 직원들을 채용하여 사업을 전국적으로 확장시켜 나갔다.
1949. 11. 13. 태릉에 삼육신학원이 개원됨
조선합회는 신학교 재건과 더불어 새로운 교육기관 부지 마련을 추진하였다. 1947년 1월에 개최된 합회 평의원회에서 신학교의 재건을 위해 조직을 결의하고, 이여식, 제임스 리 등을 교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신학교 개교를 추진하여 42명의 학생들을 받아 9월 1일부터 본부교회 날개방에서 신학 교육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대내외적 상황이 열악하여 1948년 5월에 잠시 문을 닫고 학교 부지를 구입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48년 7월에 현재 삼육대학교가 세워진 부지를 미화 7천 달러에 매입하고 대총회로부터 8만 5천 달러의 지원금을 받아 학교 시설을 본격적으로 건축하였다.
미첼 선교사의 지도 아래 8월에 실업관, 10월에 사택이 건축되었다. 이듬해인 1949년에는 교실들을 건축하였고, 이러한 교육시설을 건축한 후, 그해 11월 13일에 조선합회 신학교와 삼육중학교가 태릉으로 이전해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조선합회 신학교는 삼육신학원으로 명명하였다.
1951. 3월 15일
부산위생병원의 전신인
부산분원 개원
한국전쟁으로 인해 1950년 12월에 서울위생병원 부산 분원이 개원되었다. 한국전쟁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에 모이게 되었고, 서울위생병원의 의료진들도 피난하여 부산에서 임시진료소를 차리고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이승만 대통력은 조지 루 의사에게 부산위생병원 설립을 초쳥하였고, 이 요청에 응하여 조지 루와 의료진들은 부산시 서구 부용동의 한 창고를 임대하여 1951년 3월 15일에 서울위생병원 부산 분원을 시작하였다.
부산 분원의 의료진들은 매일 150~200명의 외래환자들을 진료하였으며, 국내외 유력 인사들을 진료 및 정기 검진을 담당하였다.
부산 분원에서의 진료 상황이 확대됨에 따라서 1953년 가을에 부산시 서구 서대신동에 1천여 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교단과 외부 원조단체의 지원을 받아 1954년에 병원을 신축하고 1955년 4월 14일에 부산위생병원으로 정식 개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52. 5월 19일 ~ 24일 한국연합회 제16회 총회 개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4일에 조선합회는 평의원회에서 교단의 명칭을 “한국연합회”로 개칭하였다. 한국연합회를 지도한 선교사들은 1951년 1.4후퇴 시에 연합회 본부를 제주도 성산포로 옮겨 피난 교회를 지도하였다.
한국연합회는 성산포를 중심으로 하여 오조리, 고성리, 신양리에 분산된 피난 교인들과 연합해서 교육 사업(삼육초,중등학교)과 의료 사업(서울위생병원 제주 분원)을 추진하였고, 성산포교회를 건축하였다.
1951년 5월 들어서 유엔군이 완벽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휴전회담이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지도자들은 서울위생병원과 시조사 복구를 추진하였다. 한국연합회는 그해 11월에 서울로 복귀하였다. 이후 한국연합회는 교단을 완전히 복구하고 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1952년 5월 19일부터 24일까지 창주에서 제16회 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에서 연합회는 남한 지역을 3개 대회(중한, 영남, 호남)로 나누고 대회 임원들을 선출하였다. 북선대회는 임성원 목사를 책임자로 세웠지만 아무런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북한 지역의 사역자들은 1954년 춘기 평의원회에서 연합회, 삼육신학원, 영남대회 등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54. 10월 20일 한국 선교 50주년 기념식 거행
1954년은 한국 재림교회 선교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국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교회는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휴전협정과 더불어 복구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1954년 들어서는 각 기관들이 정상화되었다. 한국연합회 본부 건물로 5월에 완전히 복구되었고, 삼육식학원은 그해 7월 20일에 문교부로부터 4년제 각종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기관과 교회가 안정을 찾아가게 되자 한국연합회는 1954년 10월 19일에 선교 50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고, 다음 날인 10월 20일에 회기동 본부교회에서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시조> 10월호는 선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호로 발행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 김양선 박사, 주요한 등의 글을 게재하였다. <교회지남> 10월호도 특집으로 발행되었는데, 유영순, 정동심의 역사 기록, 쿠니야 히데, 김규혁의 회고담을 실었다.
한국연합회는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인적, 재정적 자립을 향한 의지를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