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기(1938-1945)
1939. 4월 3일 ~ 8일
조선합회 제11회 총회와
조직 개편
1939년 1월에 개최된 원동지회 총회에서 조선합회 감독이었던 오버그 목사가 일본합회 서기 겸 회계로 전임되었고, 왓츠 목사가 조선합회장에 임명되었다. 이에 조선합회는 그해 4월에 제11회 총회를 개최하고 왓츠 합회장을 신임한 후 전국의 선교 조직을 다시 정비하였다.
총회에서는 그 동안 논의되었던 지방 대회 축소 문제를 매듭짓고 영남대회와 호남대회를 다시 남선대회로 통합하여 5개 대회에서 4개 대회 체제로 개편하였다. 아울러 4개 대회의 대회장을 모두 본방인 지도자들로 임명하는 결의를 했다.
이로써 중선대회장에는 정동심, 북선대회장에는 조치환, 남헌대회장에는 김항모, 서선대회장에는 최태현이 각각 임명되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제국주의적 횡포가 심화되던 때에 조선합회는 재정적 위기 속에서도 본방인 지도자들 중심의 교회 조직을 개편하였다.
1939. 10월
<시조> 창간 30주년
기념호 발행 및 기념식 거행
1939년 10월호 <시조>가 창간 30주년 기념호로 발행되었다. 이 잡지는 1909년 10월에 창간된 <세 천사의 기별>로부터 시작되었다. 1916년에 <교회지남>이 창간되어 이 잡지의 제호는 <시조월보>로 변경되었고, 1923년에 다시 <시조>로 변경되었다.
<시조>는 한국 재림교회의 선교 잡지로서 근대 한국 잡지사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잡지였다. 조선합회 시조사는 창간 30주년 기념호를 발행한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1939년 10월 3일에 <시조> 창간 30주년 기념식 행사를 본부교회당에서 거행했다. 이 기념 행사에는 조선어학회, 조선성서공회 책임자와 각 기독교파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여 30주년을 축하해 주었다.
한편 창간 30주년 기념호에는 윤치호, 최린, 백관수, 이훈구, 박흥식, 이광수, 이윤재 등 조선의 저명한 인사들의 축사가 실렸는데, 이광수는 “안식일교회와 나"라는 축하의 글에서 재림교회와의 가까운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1940. 11월 ~ 1941. 2월 선교사들의 철수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필리핀을 지배하고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예고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40년 10월에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조처를 취했다.
이로 인해 조선합회 지도자들은 1940년 11월 8일에 평의원회를 열고 모든 지도력을 본방인들에게 양도하기로 결의하고 철수를 추진하였다.
먼저 11월 16일에 왓츠 부인과 스코트 선생 등 네 명의 선교사 부인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출국하였다. 23일에는 제임스 리 부부가 필리핀으로 전임되었고, 12월 10일에는 왕거린 여사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1941년 2월 4일 합회 평의원회는 합회장을 최태현 목사에게 이양하고 전원 철수를 시작하였다. 2월 16일에 왕츠 목사와 조지 루 의사가 미국으로 돌아갔고, 25일에 쉘과 바르 목사가 미국으로 떠났고, 26일에는 클린턴 리가 필리핀으로 떠났다.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함에 따라 조선합회는 본방인들에 의해 운영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41. 4월 화강리 사건 발생
선교사들의 철수 이후에 한국 재림교회는 일제의 본격적인 탄압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 첫 번째 탄압 사건이 바로 화강리 사건이었다.
1941년 4월 4일부터 10일까지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에 위치한 화강리교회에서 충청남도 지방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중선대회장이었던 정동심 목사가 재림에 대한 설교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정동심 목사 이외에 오영섭, 박원실, 오석영, 유철준, 이성찬 등의 목회자들과 오대식, 김병두 등의 신자 대표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들은 4월 14일 청양경철서에 구속되었고, 그들 중 7인은 100일만에 석방되었으나, 정동심 목사는 6개월 형을 언도받고 1942년 2월 19일까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던 전형을 보여준 사건이 되었고, 한국 재림교회가 탄압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1941. 4월 <시조>, <교회지남> 폐간
화강리 사건이 발생한 1941년 4월에 일제는 한국 재림교회 기관지를 폐간시켰다.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교단의 기관지들을 폐간시키는 사건은 194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10월 22일에 평양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이 폐간되었고, 1942년 12월에는 성결교회 기관지인 <활천>도 폐간되었다. 재림교회 기관지인 <시조>와 <교회지남>도 이런 일제의 정책에 의거해 폐간된 것이다.
일제는 이 잡지에 담긴 말세, 재림 등과 같은 종말론적 기별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여 폐간시키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시조>가 폐간된지 2개월 후에 <건강생활>이 출간되었으나, 이 잡지마저도 나중에 교회 해산으로 인해 더 이상 발행하지 못했다.
한편 <교회지남>이 폐간된 후 1941년 8월에 <교회지침>이 발행되었으나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발행되지 못했다. 기관지의 폐간은 일제의 교회 탄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1942. 5월 사역자양성소 폐교
1941년에 선교사들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조선합회 사역자양성소는 이성의 목사의 책임 아래 놓여 있었다. 그해 11월 26일부터 12월 3일까지 개최된 조선합회 제12회 총회에서 이성의 목사는 중선대회장에 임명되었고, 사역자양성소의 소장은 조선합회장으로 임명된 최태현 목사가 겸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교육기관 탄압으로 사역자양성소는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웠다.
1942년 3월에 사역자양성소 제1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때까지 모두 100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후 14명의 학생들이 신학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5월에 동대문 경찰소 형사가 교실에 난입해 교과서와 교수 강목을 수거해갔고, 그 다음 날 사역자양성소의 폐교령이 내려졌다. 이 시기에 많은 사립학교들과 교회 학교들이 폐교되었는데, 조선합회 사역자양성소의 폐교도 그런 탄압 정책의 일환으로 폐교되었다.
1943. 12월 28일 교회의 강제 해산
일제의 교회 탄압의 마지막 수순은 교회를 해산시키는 것이었다. 1943년 1월 11일부터 13일까지 서울 본부교회당에서 조선합회 제13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지도부가 개편되었는데, 합회장은 오영섭 목사, 부회장은 이성의 목사, 서기 겸 회계는 박창욱 목사가 맡았다. 총회가 마친 후 3주가 지난 2월 4일에 최태현 목사를 포함해 오영섭, 이성의, 김상칠, 박창욱 등 조선합회 임원들이 종로경찰서의 형사들에 의해 검거되었다.
주요 지도자들이 투옥된 후 남아 있던 지도자들은 교회의 안정을 위해 대행위원을 선출한 후에 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투옥된 지도자들을 고문하여 교회 해산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최태현 목사가 6월 2일에 순교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후에 일본 경찰은 투옥된 지도자들을 협박해 교회 해산서에 강제 서명하게 하고 1943년 12월 28일일자로 재림교회를 해산시켰다.
1944. ~ 1945. 지하교회, 광야교회 시대
교회가 해산됨에 따라 교인들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거나 공식적인 교회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 정신까지 말살시키지는 못했다.
해산 후 교회 활동은 지하 교회와 광야 교회 형태로 유지되었다. 지하 교회는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성도들끼리 모여서 예배, 기도, 성경연구, 친교를 나누면서 선교하는 공동체 모임을 말한다. 김명길, 임성원, 김석영, 전가혁, 강원호, 김용호, 김겸목, 최성훈, 신종균 등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각 지역에서 지하교회를 이끌었다.
광야 교회는 은밀한 산골로 들어가서 몇몇 신자들끼리 신앙공동체를 구성하여 활동하는 공동체 모임을 말한다. 지리산 신앙공동체, 하송관 신앙공동체, 순안 신앙공동체, 태백산 신앙공동체, 적목리 신앙공동체 둥아 광야 교회의 대표적 모습이었다.
한국 재림교인들인 교회 해산으로 인한 종교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해방의 날을 고대하면서 재림 신앙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