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History

1931

4월

순안의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하여
‘조선합회 신학교’로 개칭하다.

1934

중축된 평양교회(1932)
6월

전국을 5개 대회
(서선대회, 중선대회, 북선대회, 영남대회, 호남대회)
체제로 재편하다.

1935

12월

순안의명학교에서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다.

1936

1월

경성요양병원을 신축하고
4월에 간호원 양성과가 설치되다

1937

4월

휴교 중이던 신학교를
“조선합회 사역자양성소”로 재개하다.

전국청년수양회(1935)

1938

4월

중등학교로 경성삼육원을
서울에서 개교하다

성숙기(1931-1938)

글씨크기

1931. 4월 6일 신학과 서울 이전 및
조선합회신학교 개원

1917년에 의명학교에 개설된 2년제 신학과는 운영상의 문제로 1922년에 문을 닫고 통신학교 형태로 운영되었다. 1928년에 클린턴 리 목사가 귀국하여 신학과 주임교수를 맡으면서 순안의 신학과는 다시 재개되었다. 클린턴 리는 신학과에 필요한 교재들을 편찬하고 교과과정과 학사일정을 개편하여 체계적인 신학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조선합회는 신학과를 서울에서 의논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클린턴 리는 신학생들과 교수 약 60여 명을 이끌고 1936년 4월 10일에 서울로 이주하였다. 조선합회는 신학교 명을 “조선합회신학교”로 개칭하고 본부교회당 날개방에서 신학과와 전도부인 양성과를 통합 운영했다. 교장은 오버그 합회장, 교감 및 주임교수는 클린턴 리, 교수진은 길리스, 그레이스 리, 테오도라 왕거린 등이 임명되었다.

신학과 제7회 졸업생

1931. 9월 20일 경성대전도회 개최

전도부인들

1931년 9월 20일부터 10월 29일까지 6주간 경성대전도회가 개최되었다. 조선합회는 서울의 중심이었던 장곡천정(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있는 경성공회당을 임대해서 대전도회를 진행하였다. 대전도회의 강사로는 원동지회장 그릭스 목사가 초청되었다.

이 전도회는 합회 선교부 서기였던 왓츠 목사가 이끌었다. 전도회 홍보를 위해서 전도사들과 20여 명의 신학생들이 팀을 이루어 길거리와 집집 방문을 통해 전도지를 나눠주었다.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도 강연주제와 장소를 알리는 광고를 실었다. 집회를 위해 연합 합창단을 구성하였고, 클린턴 리 목사가 진행하는 30분 성경연구 프로그램도 진행하였다.

이 전도회에 매일 4~600명의 구도자들이 참석했고, 44명이 침례를 받았다. 경성대전도회는 한국 재림교회가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3. 5월 전국 조직 축소 개편

조선합회 제8회 총회

1933년 2월 3일부터 11일까지 조선합회 제8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는 전임 대총회장이었던 스파이서 목사와 원동지회장 그릭스 목사가 참여하였다.

총회의 중심 의제는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에 따른 긴축 정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긴축 정책은 사역자 수를 줄이고, 봉급을 삭감하는 것과 더불어 지방 대회의 조직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총회 3달 후인 5월에 합회 평의원회에서 대총회 지원금 감축에 따른 조직 축소가 결정되었다.
지방 대회의 각부 주임제도가 폐지되고 합회의 각부 책임자들이 지방 대회의 각부 업무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지방 대회의 회계부를 없애고 합회에 통합 회계 사무실을 두어 운영하기로 결의했다.

아울러 각 지방 대회의 서회를 폐지하고 조선합회 서회가 전체 업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이런 조직 개편과 더불어 재정 감축안을 마련하여 시행하였다.

1934. 5월 30일 전국 지방 조직을
5개 대회로 분할

조선합회는 전국 조직을 축소한 지 1년 후인 1934년 5월 30일에 평의원회에서 전국을 5개 대회로 분할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정은 조직 개편과 더불어 추진된 효율적 선교사업 방향에 대한 연구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선합회는 재정을 긴축하는 한편 전국적인 선교 사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3개 대회를 5개 대회로 세분화하기로 결의하고 중선대회를 중선대회와 북선대회, 남선대회를 영남대회와 호남대회로 분할하였다. 여기에 서선대회를 포함해 전국을 5대 대회로 개편한 것이다.

중선대회는 서울을 본부로 하여 경기도, 강원도 영서지방, 충청남북도의 지역으로 편성하였다. 북선대회는 원산을 본부로 하여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영동지방을 경계로 하였다. 영남대회는 경산을 본부로 경상남북도를 관할하며, 호남대회는 정읍을 본부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관할 지역으로 구분하였다. 아울러 중선대회장에 최태현, 북선대회장에 정동심, 호남대회장에 김례준을 임명하여 본방인 지도력을 확대하였다.

1935. 5월 11일 조선합회 선교 30주년
기념식 거행

조선합회 제9회 총회

1935년 5월 7일부터 14일까지 회기리 본부교회에서 조선합회 제9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조선합회는 1934년에 선교 30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해는 총회가 개최되던 해가 아니었고, 경제적으로 긴축 정책을 취함에 따라 선교 30주년 기념식을 계획하지 못했다. 그러나 1935년에 총회가 개최됨에 따라 총회 기간 중인 5월 11일 안식일에 선교 3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기념식에는 초기 한국 교회 수립에 도움을 주었던 쿠니야 히데 목사가 초청되어 회고담을 듣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이 외에도 김석영, 김례준, 최태현, 벤슨 등의 원로 목사들의 간증 시간이 있었다. 선교 30주년을 맞이한 한국 재림교회는 교인수 3천명, 안교생수 8천명을 넘어서는 교세를 이루었고, 양총일, 정붕상, 이성의, 차영준 등 본방인 사역자들이 목사 안수를 받는 등 본방인 사역자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1936. 1월 경성요양병원 개원

경성요양병원

서울에서 의료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이었다. 1929년에 순안병원 책임자로 내한한 조지 루 의사는 조선합회의 결정에 따라 서울에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는 1931년 가울에 장곡천에 진료소를 개설한 후 순안과 서울을 오가면서 진료하였다.

1932년 11월 초에는 진료소를 탑골공원 옆인 인사동 136번지로 옮겨 경성요양의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간이 협소하여 더 넓은 장소를 물색하던 중 1933년 3월에 동대문 밖 휘경리에 20에이커의 부지를 매입하여 병원 이전을 추진하였다.

조선합회는 이곳에 병원을 건축하고 1936년 1월부터 경성요양병원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의 경성요양방원은 2층 벽돌 건물로 40병상을 갖춘 현대식 병원으로 건축되었다. 병원에는 X레이 시설, 투열요법 장치, 석영수은등, 멸균소독장치 등을 갖추고 분격적으로 진료를 하였다. 그리고 4월에는 간호원 양성과를 운영하였는데, 이것이 삼육보건대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1937. 5월 2일 조선합회 사역자 양성소 개원

조선합회에서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1931년부터 서울에서 재개한 조선합회신학교는 1년 후인 1932년 6월에 첫 졸업식에서 남자부 4명과 여자부 2명을 졸업시켰고, 남자부 5명과 여자부 5명을 수료시켰다. 그 후 대공황의 여파로 신학교를 계속 운영할 수 없어서 1933년부터 다시 통신학교 형태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1936년 들어서 교회의 사정이 호전되어 조선합회는 그해 11월 11일에 임시 평의원회를 열고 신학교를 재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1937년 5월 2일에 회기리교회당 날개방에서 신학 교육이 재개되었는데, 그 학교의 명칭은 “조선합회 사역자양성소”였다. 사역자양성소의 소장에는 교육부 전임서기인 클린턴 리 목사가 임명되었다. 그 해에 입학한 신입생은 남자 18명, 여자 8명이었고, 교원은 이여식, 그레이스 리, 왓츠, 이성의, 길리수 등이었다.

신학과 졸업생

1938. 4월 10일 경성삼육원 개원

1936년 1월에 신사참배 논쟁이 발생한 이후로 순안 의명학교는 점점 더 세속화되었다. 그해 12월에 조선합회가 의명학교장에 이성의 목사를 임명하자 교사진들은 취임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학교 인감 도장을 임의로 사용해 학교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순안의 조선인들에게 넘겨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합회에서는 의명학교를 순안의 주체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하고 학교 운영에서 손을 뗐다.

경성삼육원(면목동)

그후 조선합회는 1936년 11월에 임시 평의원회에서 새로운 학교를 서울에서 운영하기로 계획했다. 서울에서 중등학교 설립을 추진한 이성의, 이여식, 최태현 등은 1937년 가을에 중국과 일본의 재림교회 학교들을 시찰한 후에 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1938년 4월 10일 경성삼육원을 개설했다. 경성삼육원의 초대 원장은 이성의 목사가 맡았다. 조선합회는 1939년에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 용마산 밑에 토지를 구입하여 학교와 기숙사를 건축하고 학교를 이전하여 면목리에서 경성삼육원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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