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History

1919

조선대회가 조선합회로 승격되다.

신축된 순안교회(1925)

1922

2월

서울 회기동에
선교본부와 출판소
건물을 기공하다.

여자 신학생들(1920년대 초기)

1929

증축된 순안병원(1922)
5월

조지 루 의사 부부가 내한하다.

6월

지방 미션들이 모두
대회(서선대회, 중선대회, 남선대회)로 승격하다.

1930

1월

합회 본부와 시조사 건물이
화재로 전소되다.

확장기(1919-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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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3월 독립만세운동 참여

1919년 3월 1일에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만세 시위가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제국주의에 항거한 위대한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던 이 독립만세 사건은 기독교와 천도교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이 운동에 재림교인들도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기록한 자료에 보면 3.1운동으로 인해 수감된 사람들 중에 재림교인이 5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교회 전도사였던 박종은은 3월 2일에 예배당에서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최경선도 3월 2일에 거촌교회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순안의명학교 교사였던 전홍석은 3월 6일에 순안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홍종엽은 용인 마평리에서 3월 28일에 만세시위 행진을 주도하였고, 강영국은 4월 10일에 충남 보령에서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홍종엽

순안병원의 러셀 의사는 3.1운동 당시 일본 경찰의 총탄에 맞은 청년을 치료해 주었고, 그로 인해 경찰에 검거되어 3개월 동안 고초를 겪었다. 그 외에도 1920년 2월에는 대한독립1주년기념축하경고문 사건으로 시조사의 출판 담장자들 중에 유진상, 권학규, 유진익 등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9. 5월 9일 ~ 17일. 조선합회 창립총회 개최

1919년 3월 2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아시아지회 사무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아시아지회는 인도, 호주, 동아시아로 분리되었고, 동아시아지역은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으로 조직되었다. 원동지회는 1918년에 구성된 선일만합회를 나라별로 분리하여 조선합회, 일본합회, 대만합회를 조직했다. 이 결의에 따라서 조선의 재림교회는 1919년 5월 9일-17일에 순안에서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 창립 총회를 개최했다.

조선합회 창립총회

조선합회의 임원으로는 감독에 버터필드가 재임되었고, 서기 겸 회계는 바우어즈가 새로 임명되었다. 이외에 교육부에 하워드 리, 선교부에 클로제, 안식일학교부에 테오도라 왕거린, 의료부에 러셀, 매서부에 클로제, 시조사 총무에 바우어즈, 편집국장에 어커트가 전임 서기로 임명되었다.

한편 조선합회는 서선대회, 중선미션, 남선미션으로 지방 조직을 재편하고, 간도 지역에 간도선교지를 조직했다. 이 총회에서 순안 사역자 양성학교의 1기 졸업생이었던 김례준이 목사 안수를 받아 한국 재림교회의 네 번째 안수 목사가 배출되었다. 조선합회는 선교사들 외에도 이근억, 정문국, 김규혁, 김례준, 최태현, 김병룡, 김연묵 등의 본방인 지도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1922. 2월 20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조선합회
유지 재단(재단 법인) 설립

조선합회 전경

1920년 4월에 조선총독부는 포교규칙을 개정하여 교회당과 포교소의 설립 요건을 허가제로 전환하는 조항을 신설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교회 재산을 개인 명의로 등록하여 재산을 관리하는 문제 및 명의인의 변경 때마다 비용 이 많이 소모되는 폐단이 있었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종교법인 설립 법안이 마련되었다.

이에 한국 재림교회는 1922년 2월 20일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조선합회 유지재단”으로 법인 조직을 완료하고 정부에 등록하였다. 재단 법인 설립과 더불어 조선합회는 재정자립을 위한 의제를 논의하였다. 한국 교회는 교인수의 증가와 성장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자립 단계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한계가 많았고, 대부분의 재정을 대총회 지원금으로 해결하였다.

이처럼 높은 재정 의존도를 낮추고 자립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 조선합회의 주요 의제 중 하나가 되었다. 조선합회 지도자들은 이 문제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지남> 등에 호소문을 통해 십일금제도 강화 및 적극적인 헌금 생활을 강조하였고, 한국 교회의 재정의 자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재림교회의재정 자립은 여의치 않았다.

1922. 9월 20일 오버그 목사가 조선합회
제3대 감독이 됨

1922년 5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총회 제40회 총회에서 조선합회의 감독이었던 버터필드 목사가 미국 사스커추언합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원동지회는 조선합회의 감독에 오버그 목사를 임명하였다.

선교사들(좌측 3번째가 오버그와 부인)

오버그는 오리건주 출신으로 왈라왈라대학을 졸업하고 1908년 에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기 겸 회계, 서선합회 감독 등으로 사역하였다. 오버그는 1922년 9월 20일에 서울로 올라와 조선합회 제2대 감독으로서 사역했다. 그는 1922년에 감독직에 취임하여 1925년까지 사역하다가 부인의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28년에 다시 내한하여 1939년까지 총 14년 동안 조선합회의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오버그 목사가 조선합회 감독에 임명되었을 때에 그는 서선대회 감독으로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3년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3회 총회 때까지 서선대회장을 겸임하였다.

한편 중선미션을 겸임했던 버터필드가 미국으로 돌아감에 따라 중선미션의 감독은 정문국 목사에게 위임되었다. 그리고 정문국 목사가 책임을 맡고 있었던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의 선교 책임은 최태현 목사에게 위임되었다. 최태현 목사는 1922년 8월 29일에 간도선교지 책임자로 발령을 받았고, 그의 선교지는 김례준 목사가 대신하게 되었다.

1925. 2월 11일 첫 선교사 윌리엄 스미스 목사가
영구 귀국함

1925년 2월 11월에 윌리엄 스미스 목사가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5년에 첫 선교사로 내한한 스미스는 한국미션이 수립된 후인 1909년 9월부터 원산에 주재하면서 동해안 지역 선교를 담당하였다.

그후 왕거린 목사가 질병으로 귀국하게 되자 스미스 목사는 1916년부터 남선미션 책임자로 사역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제주도와 울릉도 선교도 적극 추진하였다. 3년 동안 남선미션에서 사역하던 스미스 목사는 1919년에는 순안 의명학교 신학과 주임교사 및 실업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그가 설립한 의명학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의명학교 신학과는 운영상의 어려움 때문에 1922년에 통신학교로 전환하게 되었고, 스미스는 이 통신학교의 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한동안 헌신하던 스미스 목사는 1923년 6월에 개최된 서선대회 총회에서 서선대회장에 임명되어 행정가로서 사역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2년 후인 1925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감으로써 20년 동안의 한국 선교 사역을 마무리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스미스 목사는 한국 선교에 대한 자전적 기록을 남겼다.

스미스 목사가 설립한
원산교회

1926. 허시모 사건 발생

순안병원 직원들

1926년에 일명 허시모 사건이 발생하여 한국 재림교회가 어려움을 겪었다. 헤이스머는 포틀랜드 재림교회 병원에서 일했던 의사로서 1925년 4월에 의료선교사로 내한해 순안병원장으로 봉사했다. 당시 순안병원은 정식 의사가 없어서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헤이스머 의사가 내한하여 병원을 증축한 후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그해 9월 2일에 헤이스머는 병원 관사에 들어와 사과를 흠친 소년(김명섭)을 붙잡아 그의 두 뺨에 초산은으로 “도적”이라는 글자를 써서 사사로이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이 약 10월이 지난 후인 1926년 6월 28일에 조선일보에 기사화되면서 허시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부각된 이유는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들과 친일 단체들이 반선교사 운동의 일환으로 확대시켰기 때문이었다.

헤이스머 의사와 조선합회 지도자들은 피해자 당사자와 가족에게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하여 화해 계약을 체결하였지만 한국 재림교회와 선교사들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일로 헤이스머는 그해 12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조선합회는 헤이즈머 대신에 1926년 2월에 내한한 간호사 출신이었던 왓츠를 순안병원장에 임명하여 의료 사업을 재개하였다.

1929. 6월 지방 대회(Mission) 시대 정착

조선합회 제7회 총회

1928년 말에 조선합회의 교세는 교인수 1936명, 안식일학교 학생수 5292명, 소학교의 학생 수 1500여 명, 시조발행 2만 부 등으로 확장되었다. 원동지회는 지회 내의 다른 나라들의 합회보다 조선합회가 성장하게 됨에 따라 조선합회 산하의 지방 미션을 모두 대회로 승격하는 결의를 했다.

이 결의에 따라 1929년 6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6회 총회에서 중선미션은 중선대회로 남선미션은 남선대회로 각각 승격되었다. 이로써 조선합회는 서선대회, 중선대회, 남선대회로 재편되었다. 아울러 서선대회장엔 이근억 목사, 중선대회장엔 최태현 목사, 남선대회장엔 푸드웰 목사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총회에서 조선합회장은 오버그 목사가 재임되었고, 선교부에 왓츠, 의료부에 조지 루, 출판부에 피어슨 등의 선교사들이 조선합회 각 부 전임서기로서 사역을 이끌게 되었고, 임성원 목사가 안수를 받고 본방인 안수 목사의 대열에 가담하게 되었다.

1930. 12월 합회 본부 및 시조사 건물 재건

1930년대 1월 24일 새벽 4시 경에 합회 본부와 시조사 건물이 화재로 인해 전소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화재로 10만원에 이르는 재신 피해가 발생했는데, 시조사의 인쇄 기계들과 귀중한 도서들이 모두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이 화재 사건으로 한국 재림교회는 큰 위기를 맞았다.

<합회 건물 화재>

그러나 조선합회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고 본부 및 시조사 건물의 재건축을 추진하였다. 교단의 지도자들은 대총회와 원동지회의 지원을 요청하고 전 교인 특별 헌금을 호소하여 건축 자금을 마련한 후에 그해 7월부터 본부와 시조사 건축을 시작하여 12월에 새로운 건물을 준공하였다.

합회 본부 건물은 회의실, 예배실, 각부 사무실로 구성되었고, 시조사 건물은 화재 방지시설을 갖춘 서적 창고와 사무실, 인쇄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본부 맞은 편에 회기동 본부교회당도 새로 지었다. 본부교회당은 십자 형태로서 중앙에 본당을 설치하고 양쪽의 날개 방을 부속실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본부 건물과 시조사 및 본부교회당을 신축함으로써 조선합회는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화재 후 재건축된 본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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