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기(1910-1919)
1910. 8월 5일 ~13. 한국미션 제1회 연회 개최
한국미션 제1회 연회가 1910년 8월에 서울에서 대총회 부회장인 에반스 목사와 일본미션 감독인 필드 목사의 지도 아래 개최되었다. 연회가 진행되기 전에 먼저 에반스 목사의 지도로 일주일간의 사경회가 개최되었는데, 한국의 사역자들은 “재림의 징조”에 대한 그의 강의를 통해 기별을 공부했다.
사경회가 마친 후에 연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연회에서 한국미션 감독은 버터필드가 연임되었고, 서기 겸 회계에는 오버그가 새롭게 임명되었다. 아울러 이 연회에서는 한국의 선교지역을 4개에서
5개로 재편하여 한국미션의 각 지부를 설치하였다.
서울 지역은 오버그와 김례준, 중선 지역은 버터필드와 송용수, 서선 지역은 러셀과 이근억, 남선 지역은 왕거린과 김규혁, 동해안 지역은
스미스와 김효섭에게 선교의 책임을 맡겼다. 이와 더불어 연회에서는 몇 가지 사업들이 결의되었다.
첫째는 월간 선교 잡지의 출간을 서두르며, 편집인으로 샤펜버그를 임명했다. 둘째는 인쇄 사업을 활성하하여 선교책자와 예언 해석 팸플릿을 출간하기로 했다. 셋째는 순안 의명학교 내에
여기숙사를 건축하여 남녀공학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을 통해 한국미션은 지역 선교를 위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0. 10월 20일 <세 천사의 기별> 발행
1908년 11월에 개최된 한국미션 총회에서 지도자들은 월간 선교잡지 발간을 결의했다. 이 결의는 1910년 2월 사역자 수양회에서 다시 논의되었고, 그해 8월에 개최된 연회에서도 긴급 의제로 결의되었다.
출판 사업을 맡은 샤펜버그는 이런 결의에 따라 선교잡지의 출간을 추진하여 1910년 7월 1일에 <특별한 기별>이란 선교잡지를 발간했다. 그후 9월에 정기간행물로 <말세복음보>를 간행하여 본격적인 월간지 발행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세워진 일제의 총독부에 의해 제호 변경을 요구받고 제호를 <세천사의 기별>로 바꾸어 10월 20일에 제1호를 발행함으로써 본격적인 월간 잡지를 출간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에는 <매일신보> 외에 월간 잡지 3종만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재림교회 월간지 발행은 한국 잡지사에서도 의미 있는 역사가 되었다.
<시조>의 전신이 된 이 선교 잡지는 “신자들의 신덕을 견고하게 하”고 “영원한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으로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1916년에 교단의 공식 기관지인 <교회지남>이 창간된 이후에는 순수한 선교 잡지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1912. 미션본부 회기동 이전 및 전국 선교 개척
1909년에 한국미션 본부가 서울로 이전하였을 때, 본부는 서대문구 월암동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곳은 베델의 집에 세를 얻어서 마련한 곳이었기 때문에 항구성이 없었고, 여러 선교사들이 내한함에 따라 선교사 사택을 별도로 구입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미션본부를 구축할 부지 구입을 추진하여, 1912년7월에 현재의 한국연합회 부지(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회기리)를 매입하고, 그곳에 본부 건물과 선교사 사택 3동을 건축하였다.
대지 구입 및 건축 비용은 대총회가 지원한 30만 달러로 충당되었다.
본부 건물은 2층으로 건축되었는데, 1층은 미션 본부와 인쇄소, 2층은 예배당으로 지어졌다. 선교사 사택에는 버터필드(감독), 오버그(서기), 프랭크 밀스(인쇄소 총무), 샤펜버그(편집장)가 입주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 재림교회의 선교구내(mission compound)가 형성되었다. 이곳에 미션 본부와 인쇄소, 선교사 사택 등이 구비되면서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은 안정적인 선교 활동을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전국 선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1913. 순안의명학교, 순안병원 준공
순안 사역자 양성학교는 사립학교령에 따라서 1909년부터 의명학교라는 명칭으로 운영하였다. 1910년 1월 10일에 설립 인가를 받은 의명학교는 사립학교령에 부합하는 교육 시설을 확보해야만 했다.
의명학교는 1911년 4월에 대총회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아 5천 평의 토지를 구입하여 실습 농장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1911년 8월 23일에 교사였던 하워드 리가 교장에 부임하면서 학교 시설의 확대를 추진하였다. 특별히 의명학교는 1913년 3월에 제1회 졸업생(6명)을 배출한 후에 현대식 교실을 건축하였고, 남녀 공학 및 실업 교육과 기숙사 교육을 실시하는 정규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순안진료소도 의명학교 구내에 별도의 2층 건물을 건축하여 현대식 순안병원을 운영하게 되었다.대총회는 순안병원 건축을 위해 1913년 해외선교자금 중에서 7천 달러를 순안병원 건축을 위해 지원해주었다.
러셀은 이 자금으로 36X69피트의 지상 2층 벽돌 건물을 건축해 근대식 시설을 갖춘 순안병원을 만들었다. 이로써 순안병원은 지역사회에서 유명한 의료기관으로 인정을 받았다.
1915. 4월 6일~13일 최초의 안수목사 탄생
1915년 4월에 조선미션 제5회 연회가 순안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연회에는 대총회장 대니얼스 목사가 포터(부회장), 풀턴(호주합회장)과 함께 참석하였다. 대총회장과 그 일행은 5월 초에 중국 상하이에서 있을 아시아지회 창립 총회를 지도하기 위해서 나선 해외 순방길에서 한국미션을 지도하기 위해 이 연회에 참석한 것이었다. 세계 선교에 집중했던 대니얼스 대총회장은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입항해서 남선 지역의 선교 본부가 있던 경산과 중선 지역 선교 본부인 서울을 방문한 뒤에 순안에 도착해서 이 미션 연회를 지도하였다.
이 연회에서 정문국과 이근억이 한국 재림교회 역사상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한국에는 본방인 사역자로 정문국, 이근억, 김규혁 등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앞의 두 사람은 1915년에, 김규혁은 1917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외에도 강화석, 김석영, 김례준, 김병룡, 김봉걸, 김항모, 정기창, 벡낙든, 임소천, 최태현, 홍신후, 안창모 등이 전도사로 활동하였는데, 이들도 대부분 나중에 목사 안수를 받고 재림교회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 재림교회는 선교사들 이외에도 본방인 사역자들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1916. 7월 26일 <교회지남> 창간
재림교회 첫 월간지인 <세천사의 기별>이 출간된 지 6년 후인 1916년 7월에 새 월간잡지 <교회지남>이 발행되었다. 이 잡지는 안식일학교 교과과정, 선교부와 매서부 등 각 부서의 소식들과 조선합회의 회계 보고 및 교회 통신 등으로 구성된 교인들을 위한 기관지 성격의 잡지였다.
이처럼 교단의 공식 기관지인 <교회지남>이 출간됨에 따라 <세 천사의 기별>은 11월부터 <시조월보>로 잡지명을 바꾸고 선교 잡지로만 운영하였다. 그리고 출판소도 “시조월보사”로 명명하였다. 시조월보사는 월간 잡지 외에도 단행본들을 본격적으로 출판하기 시작했다. 1913년에 <예수의 오실 징조>, 1914년에 <다니엘 석의>, <묵시록 해석> 등이 출판되었고, 1916년에는 <신약성경과 안식일>이 발행되었다.
1918년에는 <세계적 대전쟁>, 1919년에는 <고대사화> 등과 같은 엘렌 화이트의 서적들이 일부 편역 출판되었다. <교회지남>이 간행된 지 2년 후인 1918년에 인쇄소 건물을 2층으로 증축하여 편집실, 인쇄실, 예배실을 갖추었고, 1920년에는 미국에서 마블 인쇄기 1대를 구입하여 <시조월보>의 발행부수를 5천부에서 1만부로 확대하는 등 출판사업이 발전하였다.
1917. 2월 7일~14일 조선대회 승격
1915년 5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아시아지회 제1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대총회는 1913년에 유럽지회 총회를 조직한 후에 1915년에는 아시아지회 총회를 조직하였다.
이사아지회는 중국과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 전지역과 호주를 아우르는 지회 조직이었다. 아시아지회 총회가 조직된 후 한국미션은 선교적 성장을 인정받아 1917년 2월에 개최된 조선미션 제6회 총회에서 조선대회(Chosen Conference)로 승격되었다.
조선대회는 아시아지회에서 두 번째로 승격된 대회였다. 이 총회에서 김규혁 전도사가 세 번째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조선대회가 승격된지 2달 후인 1917년 4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아시아지회 제2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총회에서 조선, 일본, 만주를 하나로 묶는 동아시아합회(East Asian Union Conference)가 조직되었고, 본부는 서울에 두었다.
동아시아합회는 1918년 10월에 일본 도쿄에서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합회 명칭을 선일만합회(Japan-Chosen-Manchurian Union Conference)로 바꾸었다. 조선대회는 이 선일만합회에 소속되었다.
1917. 9월 1일 신학과(2년제) 설립
순안의명학교는 원래 사역자 양성학교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졸업생들 대부분이 한국 재림교회의 교회와 학교와 기관에서 사역하는 사역자가 되었다. 1913년 제1회 졸업생 6명 중 4명이 사역자의 길로 나아갔다. 한국미션의 초창기 사역자는 의명학교 졸업생 중에 전도사 혹은 문서전도인, 교사 등으로 임명되어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1917년 2월에 한국미션이 조선대회로 승격되자, 그해 7월 25일에 대회 평의원회에서 순안의명학교 내에 2년제 신학과를 설치하는 안건을 논의했다. 이 논의의 결과로 그해 9월 1일에 2년제 신학과를 개설하고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과 전문 과정을 시작했다.
신학과는 4년제 중학 졸업 학력을 갖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 개설 첫 학기에 6명(김영우, 림기학, 정동필 정붕상, 정만호, 조치환)이 입학하였는데, 이들은 의명학교를 졸업하고 교역자로 봉사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봉급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이들 중에서 정붕상과 조치환이 1919년 3월에 졸업하였다. 신학과 개설 당시에 학과장은 버터필드, 주임교수는 스미스가 맡았고, 러셀과 하워드 리를 포함해 오버그, 김창세 일본인 나가도리 등이 교사로 봉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