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1904-1910)
1904. 6월
최초의 한국
재림교인 등장
한국에 재림교인이 등장한 것은 1904년이었다. 하와이 이민을 위해 일본 코베에서 머물던 이응현과 손흥조가 코베 안식일교회의 전도사인 쿠니야 히데에게 재림교회 기별을 듣고 그해 6월에 침례를 받아 최초의 한국 재림교인이 되었다.
재림교인이 된 후 이응현은 하와이로 떠났고, 손흥조는 이민 수속 심사에서 떨어져 한국으로 돌아오던 중 배 안에서 감리교인이던 임형주를 만나 안식일과 재림 기별을 공유하였다. 귀국 후에 손흥조는 동래에서 선교 활동을 했고, 임형주는 이름을 임기반으로 개명한 후 진남포를 중심으로 안식일과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임기반은 진남포 일대에서 30여 명의 구도자를 얻었는데, 이들은 재림교회 기별을 받아들인 후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일본에 있는 쿠니야 히데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에 와서 교회가 설립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한국 재림교회의 최초의 선교는 본방인들의 신앙 고백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
1904. 9월 27일
최초의 교회 조직 및
한국 선교구 조직
임기반의 지도 아래 진남포 일대에서 형성된 구도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은 쿠니야 히데는 1904년 8월 9일에 진남포에 도착하여 주흥리의 정원걸의 집에서 구도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쿠니야 전도사의 활동으로 8월 중순에 임기반, 강창오, 정원걸, 김범준, 김승호가 침례를 받았다.
그후 선돌 감리교인들 중 20명이 추가로 침례를 받았다.
쿠니야는 임기반과 정원걸의 도움을 받아서 진남포 일대의 16개 마을에서 재림기별을 전했다.
그후 9월 13일에 일본미션 감독인 필드 목사가 내한해서 17일 동안 선교활동을 지원했다. 필드 목사는 하국 최초의 재림교회인 선돌교회(평남 용강군 지운면 입성리), 강대모루교회(평남 강서군 보림면 남삼리), 용동교회(평남 용강군 오신면 구룡리), 바메기교회(평남 중화군 해압면 간곡리)를 조직하고, 9월 27일에 한국 선교구(Korean Mission Field)를 조직하였다.
한국 선교구는 일본미션에 속한 선교 구역이었으며, 그 선교구의 임시 책임자는 임기반이 임명되었고, 서기에는 강창오가 임명되었다
1905. 11월 최초의 선교사(스미스) 내한
일본미션 감독이었던 필드 목사는 대총회에 한국 선교구가 조직되었다는 소식을 대총회에 전했다. 대총회는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접한 뒤에 조선 선교에 대한 호소문을 <리뷰 앤드 헤럴드>에 게재하여 한국에서 활동할 선교사를 모집하였다.
당시에 왈라월라대학을 졸업한 후에 상부 컬럼비아합회에서 사역를 하던 윌리엄 스미스가 이 호소에 응하여 그의 부인(에디 카나한) 및 9개월 된 딸(윌레나)과 함께 한국 재림교회 첫 선교사로 내한하게 되었다.
스미스는 1905년 10월 20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손흥조와 교인들을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다. 그는 이틀 후인 22일에 경부선을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한 후에 일본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그해 11월 17일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본격적인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서울에 머물면서 2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하며 선교의 길을 모색하던 스미스는 1906년 2월 7일에 교인들이 있는 진남포로 출발하여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06 순안 본부 체제 구축
스미스 목사가 순안에 본부를 세우고 본격적인 선교를 전개한 때는 1906년 여름이었다. 1906년 2월에 진남포에서 재림교인들을 만난 스미스는 그곳의 환경이 열악하여 서울에 거처를 두고 진남포를 왕래하면서 교회를 지도했다. 그러나 진남포 교인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스미스는 1906년 5월에 진남포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진남포가 선교 본부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스미스는 그해 여름에 평양과 가까운 순안으로 선교 본부를 옮겼다.
당시 순안에는 장료교에서 개종한 김두형이라는 유력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스미스를 초청해 순안에 교회를 세웠다.
스미스는 순안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그곳으로 이주하여 선교 분부를 세움으로써 순안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에 순안, 평양, 함종, 중화 지역에도 교회가 새롭게 세워졌다.
일본미션 감독인 필드 목사가 내한해 함종교회에 이봉승, 순안교회에 김승원, 순안 이북마을에 김두형, 평양교회에 강근명, 선돌지역에 이성일 등의 사역자를 추가로 배치하여 지역교회의 선교 활동을 지도하게 하였다.
1907. 9월 12일 순안 사역자 양성학교 개교
1907년 1월에 한국 재림교회 최초의 여선교사인 미미 샤펜버그가 내한했다. 샤펜버그는 배틀크릭대학 출신으로 문서전도사로 활동하던 중 한국 선교에 대한 요청을 받고 선교사의 길에 들어섰다. 샤펜버그의 내한 후, 스미스 목사는 그녀와 함께 사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 평안남도 관찰사로부터 학교 설립에 대한 의지를 문의 받은 스미스는 김두형을 통해 학교 설립에 대한 의지를 관찰사에게 피력하였다. 그 결과 재림교회 선교부는 평안남도 관찰사로부터 석박산 기슭(평남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의 부지(45에이커)를 무상으로 임대를 받았다. 스미스와 샤펜버그는 대총회의 지원금과 미국의 지인들로부터 받은 건축 자금(총 693엔)으로 이 부지 위에 기와집 7간을 짓고 9월 12일에 순안 사역자양성학교(4년제 보통과, 3년제 고등과)를 개교했다. 이 학교가 개교한 것은 12월 9일이었고 첫 학생은 남학생 5명, 여학생 6명이었다. 1908년에 사립학교령이 발효되어, 이 학교는 남자 중등교육기관인 순안 의명학교로 정식 등록하였고, 여학교는 샤펜버그의 지도 아래 신흥동, 군상리 등에서 별도로 운영되었다.
1908. 6월
순안 진료소
시작
1906년 11월 14일에 스미스 목사의 어린 딸 윌레나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스미스는 한국에서의 의료 사업을 위해 대총회에 의료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호소에 응한 인물은 릴리 러셀이었다. 1908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한 릴리 러셀은 2달 전에 결혼한 부인(엘라 캠프)과 함께 1908년 9월 24일에 내한해 의료 사역을 시작했다.
러셀은 진료할 건물을 별도로 마련하지 못해 사택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환자들이 많아지게 됨에 따라 순안 사역자 양성학교의 교실 한 칸에서 순안진료소를 개설했다. 그곳 역시 진료소의 공간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새로운 진료소 건물이 필요했다.
1909년 9월에 선교 본부가 순안에서 서울로 이전되었고, 샤펜버그도 서울로 옮기게 됨에 따라 러셀은 그녀가 살던 집을 20달러에 구입해 순안진료소로 사용하였다. 러셀은 이 건물을 구입하고 약품을 구입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부친에게 호소하여 200달러의 자금을 모금했다. 이렇게 구입한 건물과 의약품으로 러셀은 4년 동안 2만여 명의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 내용이 <리뷰 앤드 헤럴드>에 “20 달러짜리 건물에서 2만 여 명의 환자를”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러셀의 의해 시작된 의료선교 사업은 교육선교 사업과 더불에 한국 재림교회 성장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1908. 11월 한국미션 조직 및 출판 사업 전개
1904년에 일본미션에 소속된 선교구로 조직되었던 한국 재림교회는 1908년 11월 일본미션으로부터 독립된 한국 미션(Korean Mission)으로 정식 조직되었다. 한국 재림교회의 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자 대총회는 행정력을 갖춘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찰스 버터필드 목사를 한국 선교 책임자로 선정하였다. 배틀크릭대학을 졸업하고 미네소타합회와 오리건합회에서 사역하던 버터필드는 1907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08년 9월 25일에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을 떠나 10월 경에 한국에 입국했다. 한달 후인 11월에는 대총회 회계인 에반스와 일본미션 감독인 필드가 내한해 순안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한국미션(Korean Mission)을 조직하였다.
한국미션의 초기 감독은 버터필드, 서기 겸 회계는 스미스가 임명되었고, 의료부, 교육부, 안식일학교부, 출판부 책임자들이 임명되었다. 특별히 이 총회에서는 출판 사업과 선교 잡지 발행이 결의되었다. 한국 재림교회 출판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미션은 교합인쇄기 1대와 우리말 활자를 보내주었다. 한국미션 지도자들은 1909년 3월에 순안 의명학교 교실 한 칸을 비워 그 인쇄기를 설치하고 출판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의 책임자로 스미스 목사가 임명되었지만 실무는 샤펜버그가 맡았다. 그녀와 함께 일본에서 인쇄 기술을 익힌 김승원과 김규혁이 초기 출판사업을 전개하였다.
1909. 9월 선교본부 이전 및 선교지역 분할
1906년에 순안 본부 체제를 구축했던 한국미션은 1909년 9월에 본부를 서울(월암동)로 옮겼다.
한국미션 본부의 서울 이전은 1908년 11월에 개최된 미션 창립 총회에서 결의된 내용 중 하나였다.
순안은 평양에서 가깝기는 하지만 변방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선교 본부로서 적합한 지역은 아니었다. 이에 한국미션은 독립 선교 조직을 갖춘 후 본부의 서울 이전을 결의한 것이었다.
한국미션의 본부 이전을 위해 구성된 5인위원회는 서울 북부의 월암동에 위치한 베델(대한매일신보 사장)의 주택을 세로 얻어 선교 본부와 인쇄소를 그곳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한국미션은 서울 본부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선교를 확장하기 위해 선교지 분할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일을 위해 한국미션은 1910년 2월에 서울에서 한 달 동안 사역자 수양회(Worker’s Institute)를 개최하였고, 이 집회 이후에 한국 전역을 네 개의 선교지역으로 나누었다. 중선 지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오버그와 김례준을 사역자로 배치하였고, 서선 지역은 순안을 중심으로 러셀과 이근억을 사역자로 배치하였다. 남선 지역은 경산을 중심으로 왕거린과 김규혁을 배치하였고, 동해안 지역은 원산을 중심으로 스미스와 김효섭을 사역자로 배치했다. 1909년에 이르러 한국미션의 서울 본부 체계 및 지역 선교 분할 체계가 수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