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메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거제도의 제64 야전병원에서 서기병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헬렌 도로시 사보(Helen Dorothy Sabo)와 결혼한 후 21일만에 비무장전투요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제대 후에 몽고메리는 로마린다대학교(LLU)에서 치과를 전공하여 1962년 졸업한 후에 치과의사가 되었다. 그는 오하이오주 벨빌(Bellville, Ohio)에서 치과병원을 개업하여 1980년까지 개업 치과의사로 일했다. 그러던 중 그는 대총회로부터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50세에 접어든 몽고메리는 1980년 5월 11일에 아내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5월 18일에 내한해 서울위생병원 치과의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서울위생병원이 성장하는 시기에 15년 동안 치과의사로 봉사하였다. 특별히 그는 국내 환자들은 물론이고 외국인 환자들을 많이 진료하였는데, 그의 외국인 환자들은 주한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핀란드 대사관 직원들과 각 교단의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그 외에도 외국계 회사의 한국 주재원들도 있었다. 특별히 의료 선교사로서 그는 보건소가 없는 지방들을 다니며 무료 진료(160여 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종종 지역교회 초청을 받아서 설교도 하였다. 1981년에 한 산모가 아이를 낳고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몽고메리 부부는 그 아이를 10개월간 돌본 후에 미국으로 입양을 시키기도 했고, 안식일 문제로 집에서 쫓겨난 삼육대학 학생을 3년 동안 돌봐주었는데, 그는 필리핀과 미국에서 치과의사로서 공부를 마치고 국내에서 치과를 개업하였다. 몽고메리는 이 외에도 많은 학생의 젊은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도 했다. 몽고메리는 치과 의사로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원동지회의 결정에 따라 앤더슨의 후임으로 1986년부터 구호봉사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1995년까지 구호봉사부장으로 일하면서 아드라 코리아(ADRA Korea, 삼육국제개발구호기구) 창립에 초석을 놓았다. 한편 그의 부인인 헬렌(Helen D. Montgomery, 1930년 12월 23일생)sms 영어영문학과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쳤다.
몽고메리가 사역을 마칠 즈음에 그의 막내 아들(Monte E. Montgomery, 모은태)이 치과의사가 되어 선교 사역을 이어 받았다. 몬테는 한국 여성(윤창숙)과 결혼한 후 로마린다대학교 치과대학에서 공부하여 치과의사 자격을 갖춘 후에 아버지에 이어 서울위생병원에서 2대째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몽고메리는 기쁜 마음으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준 후 15년의 사역을 마치고 1995년 3월 8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몽고메리는 테네시주에 정착해서 치과의사로 일하면서 농장을 가꾸는 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참고자료] 「교회지남」, 1980년 7월호, 18; 1995년 5월호, 14, 15; Adventist Review, May 1, 198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