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터는 캘리포니아에서 교사로 일했고, 레이크연합회(Lake Union) 위스콘신합회에서 안식일학교부 사무원으로 근무하다가 1959년에 오하이오주 워싱턴(Worthington, Ohio)에 있는 하딩요양병원(Harding Sanitarium)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2년 동안 근무하던 그녀는 1961년에 원동지회장 비서실로 발령을 받고 그해 11월 2일에 싱가포르로 입국하여 선교사로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두 번의 휴가를 미국에서 보내면서도 원동지회 비서실과 원동지회 아카데미(타이핑 교사)에서 6년 이상 봉사하다가 한국 선교로 부름을 받았다.
웰터 페이는 1967년 4월경에 서울위생병원 부속 고아원(Seoul Sanitarium Orphanage, 성육원) 원장으로 소명을 받아, 그해 7월 5일에 내한해 그레이스 루(Grace Rue)를 대신해 성육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녀가 원장으로 사역하는 동안 성육원은 여건이 좋지 않아 점점 축소되었다. 1970년에는 성육원 부지(동대문구 상봉동 200번지)가 매각되면서 고아원을 중화동(동대문구 중화동 317번지)로 이전하였고, 부설로 운영하였던 성혜삼육초중등학교가 폐교되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성육원의 사업을 이끌던 웰터는 1973년에 원동지회로부터 지회 아카데미(Far Eastern Academy)로 부름을 받고 그해 6월에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이주하여 그곳의 여학교 교감으로 봉사하게 됨에 따라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감했다.
웰터 페이는 1983년에 대총회 비서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참고자료] Lake Union Herlad, June 23, 1959, 11; Far Eastern Division Outlook, December, 1961, 12; May, 1967, 5; June, 1967, 16; November, 1973, 4; Review and Herald, September 8, 1966, 19; July 28, 1983, 11; 「교회지남」, 1967년 8월호,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