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슨은 1959년에 미국 유니온대학(Union College)에서 신학사(B.A.), 1970년에 앤드류스대학교에서 신학석사(M.A.)를 졸업하고 일리노이주에 있는 교회(Independence Boulevard and Robbins, Ill.)에서 목사로 사역하였다. 그는 196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대총회로부터 한국 선교의 부름을 받은 앤더슨은 1975년 1월 19일에 내한해 교육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앤더슨은 메리(Mary Saba Anderson, 1932년 12월 20일생, 安道順)과 결혼하여 함께 내한했는데, 그녀는 삼육대학 영어영문학과에서 영어 회화를 가르쳤다.
앤더슨은 1975년 3월 1일부로 삼육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신학과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77년 10월 13일부터 1980년 2월 25일까지 신학과장도 역임했다. 아울러 그는 대학 근교에 있는 임송교회 예식담임을 맡아서 지역교회를 위해서도 사역하였다. 당시에 신학과의 유일한 조직신학 교수로 활동하던 앤더슨은 안식년을 맞이해 1980년 2월 25일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안식년 기간 중에 앤드류스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1982년 7월 13일에 다시 내한하였다.
신학과 교수로 복귀한 앤더슨은 원동지회의 결의에 따라 1983년 8월 16일부로 한국연합회 구호봉사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버딕트(Alfred W. Burdick) 교수의 후임으로 구호봉사부 책임자로 임명된 앤더슨은 미군의 잉여 물자를 원조받아서 서울과 부산의 위생병원 및 각급 삼육학교들에 의료기구나 교육 기자재 등을 분배하였다. 이처럼 대학의 교육사업과 구호봉사사업을 위해서 헌신하던 앤더슨은 1986년 5월에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로마린다대학교 치과대학의 구강외과 과장으로 임용되어 보건의료 계통에서 사역하였다.
[참고자료] North American Informant, January-February, 1973, 6; 「교회지남」, 1975년 5월호, 33; 1978년 1월호, 18; 1982년 9월호, 19; Review and Herald, October 28, 1982, 22; 『한국연합회 총회의사록』, 1978, 1983. 송숙자 . 『삼육동이야기』. 서울: 삼육대학교, 1996; Seventh-day Adventist Yearbook, 1987, 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