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리, 조지 셜다인

George Sherdain Haley
1959. 10. 04-1981. 07. 04
1934
미국, 실업교육자
하정식(河正植)
헤일리는 1934년에 미시간주 시스터 레이크(Sister Lakes, Mich.)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1살 되던 해인 1945년에 재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948년에 8년 과정의 헤드 밀 학교(Red Mill School)를 졸업하고 도와잭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1949년 여름에 부친과 함께 침례를 받고 재림교회에 정식 입교하였다. 1951년에 미시간주 실버스프링스에 위치한 임마누엘 선교대학(Emmanuel Missionary College)에 부속 아카데미에 들어가 1952년에 과정을 마치고, 그해 가을에 임마누엘 선교대학이 입학해서 학교 목장에서 노동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1957년 6월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문서전도자로 활동하다가 메이플라워 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했다.

  헤일리는 1957년 연말에 군에 입대하여 포트 래너드 우드(Port Lenard Wood) 보충대에서 대기 후 텍사스주 휴스턴의 포트 샘(Port Sam)에서 5개월 동안의 기본 훈련을 받고 한국에 배치되었다. 1958년 4월에 그는 부평에 있는 미군 제1의무대(First Medical Army)로 배치되어 예방의학팀 소속으로 한국에서의 군봉사를 하였다. 헤일리는 한국에 오자마자 첫 안식일부터 한국연합회 본부(시조사 2층)에서 예배를 드렸다.

  헤일리는 군복무를 마치기 직전인 1959년 1월에 한국연합회장 데이비스 목사의 조언으로 삼육신학원의 농장 관리 및 농업 지도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이 요청에 응하여 한국 선교에 뜻을 갖게 된 헤일리는 1959년 4월 26일에 예배 모임에서 만난 제인 리톤엔 간호사와 결혼한 후 그해 10월 3일에 제대하자마자 삼육신학원에서 농장 관리자로 근무를 시작했다. 1961년 삼육신학원이 삼육대학으로 승격되고, 농업교육과가 신설되자 그는 그 학과의 초대 학과장 및 실업부 책임자로 사역하였다. 이 시기에 헤일리는 삼육대학에 목장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젖소 구입 등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1963년 5월에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농학을 공부하면서 젖소 구입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였다. 이런 헌신적인 노력 끝에 헤일리는 라시에라 대학(La Sierra College) 목장에서 20마리의 젖소를 구입하여 배에 선적하여 한국으로 이송하였고, 삼육대학의 목장에서 본격적으로 삼육우유 생산을 시작하였다. 그는 삼육대학 실업부장으로 1965년 4월 6일에 대학 우유생산라인을을 구축하여 스킨 밀크, 초코 밀크, 허니 밀크, 버트 등을 생산하여 삼육대학의 재정을 확대하였다.

  1967년 7월 안식년을 맞이해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가 3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헤일리는 1969년에 삼육대학에서 10년간 근속한 근속패를 받았다. 이후 1970년 4월에 다시 3개월의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그해 6월 11-20일에 개최된 대총회 제51회 총회에 한국연합회 대표를 참석하였고, 그해  8월에 대시 하국으로 돌아와 농업교육과와 실업부장으로서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특별히 농업교육과 교수로 봉사하면서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 미생물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여 1973년 5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의 학위 논문은 “감염성 유방염 젖소 우유의 세균충에 관한 연구”였다. 그는 젖소의 산유량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젖소 유방염의 발생 원인 및 방제에 관한 연구를 통해 삼육우유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목장 및 삼육우유 생산 및 명성으 확대되자 그는 추가로 젖소를 구입할 필요를 느꼈다. 이게 1973년 10월 22일에 미국으로 돌아가 65마리의 젖소를 구입한 후  대한항공 특별기편으로 네브라스카주 링컨 시에서 한국으로 이송하였다. 헤일리의 이런 헌신으로 삼육대학 목장은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삼육대학은 1974년 1월에 삼육기술전문학교 설립 인가(낙농과, 식품영영과)를 받았는데, 헤일리는 그해 3월에 본격 개교한 이 전문학교의 교장 및 낙농과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에 헤일리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키와니스 클럽(Kiwanis clubs, 봉사단체)로부터 재정을 후원받아 “한국을 위한 젖소”(Cows for Korea)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소외된 계층의 자녀들에게 우유를 공급해주는 사회봉사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75년 7월에 안식년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대총회 제52차 총회에 참석하였는데, 그 총회 경영위원회에서는 헤일리의 한국 선교 활동이 소개되기도 했다. 안식년으로 1년의 휴가 기간을 보낸 후 1976년 6월에 다시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헤일리는 명칭이 변경된 삼육대학 병설 삼육기술전문학교의 교장으로 계속 봉사하였다. 한편 1977년에는 젖소 120마리를 두 차례에 걸쳐 수입하여 목장의 규모 및 우유 생산을 더 확대하였다.

  이렇게 삼육대학 목장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하던 헤일리는 20여 년간 삼육대학의 교수 및 실업부 책임자로서 헌신하여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8년 12월 5일에 한국 정부가 주최하는 국민교육헌장 선포 10주년 기념식에서 국민포장(Civil Merit Medal)을 받았다. 헤일리와 그의 아내 리톤엔은 1979년 4월 7일에 영문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영어교회를 조직하는 등 교회 사역을 위해서도 헌신하였고 삼육대학 교육사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수고를 하였다. 이렇게 선교사로서 헌신한 헤일리는 1981년 5월 27일에 한국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마감하고 미국으로의 영구귀국을 환송하는 예배에 참여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그해 7월 4일 모든 사역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 헤일리는 시각 장애로 인해 미시간주 캘러머주(Kalamazoo, Mich.)에서 6주간의 시각장애인 재활 프로그램 교육에 참여하였고, 웨스턴 미시간대학교에서 시각장애인들의 재활을 돕는 교사 자격을 위한 석사과정을 이수한 후, 시카고 근처에 있는 시각장애인센터에서 봉사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시각 장애를 위해 11년간 재활 프로그램 교육에 참여했으나 계속해서 시력이 나빠져 1996년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2011년 5월 7일에 그의 아내 리톤엔이 사망하였고, 10월에 진 스크립너(Jean Scribner)와 재혼하여 미시간주 리틀 크루키드 레이크(Little Crooked Lake, Mich.)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참고자료] The Herald-Palladium, June 10, 1978. 14; Lake Union Herald, June 25, 8; Seventh-day Adventist Yearbook, 1960, 102; 1961, 105, 249; 1962, 106; 1963, 112, 282; 1964, 120, 295; 1965-66, 122, 123, 303; 1967, 124, 125, 304, 305; 1968, 127, 311; 1969, 133, 321; 1970, 135, 331; 1971, 152, 340, 1972, 161, 310, 1973-1974, 161, 310; Review and Herald, November 19, 1964, 20; April 15, 1965, 10; December 30, 1965, 18; April 25, 1968, 20; June 11, 1970, 11; October 8, 1970, 24; June 3, 1971, 18; May 17, 1973, 32; August 9, 1973, 15; Pacific Union Recorder, October 26, 1964; Far Eastern Division Outlook, December, 1964, 12; Spetember, 1968, 5; May 1970, 4; November, 1972, 11; May, 1973, 15; September, 1974, 8; 「교회지남」, 1964년 12월호, 36; 1965년 5월호, 36; 1966년 2월호, 7; 1967년 8월호, 36; 1970년 7월호, 16; 1971년 7월호, 15; 1971년 8월호, 12; 1927년 9월호, 3; 1973년 1월호, 24; 1973년 12월호, 15; 1974년 4월호, 19, 1974년 6월호, 39; 1975년 9월호, 34; 1975년 9월호, 8; 1976년 10월호, 13; 1979년 3월호, 18; 1979년 6월호, 18; 1981년 8월호, 16, 17; 1981년 9월호, 18;  김재신, 『삼육대학교 90년사』. 서울: 삼육대출판부, 1998, 186; 이국헌, 『삼육대학교100년사』. 서울: 삼육대출판부, 2009; 남대극 편역, 『장수돈, 장미도, 하정식 이도연 회고록』. 서울: 삼욱대학교출판부,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