롭슨은 세인트 헬레나 요양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1946년 10월 10일에 한국 선교에 대한 부름을 받고, 비자를 취득하는 동안에 한국어를 공부하다가 1947년에 S. S. 컴포트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항을 출발하여 그해 6월 26일에 한국에 온 미혼의 미국 간호사였다. 그녀는 일제 말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해방 후 다시 한국에 오게 된 테오도라 왕거린 여사와 동행하여 한국에 왔다. 그녀는 서울위생병원의 간호원장으로서 봉사하였다. 아울러 1947년 9월에 재건된 “위생병원 부속 간호원 양성소”의 교장을 겸임했다. 롭슨의 지도 아래 간호원 양성소는 미국식 간호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경성대학이나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부속 간호학교와 더불어 명성을 얻기도 했다.
한국 전쟁 발발로 인해 롭슨은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서울이 다시 수복되자 1950년 10월 18일에 조지 루 박사 부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피난 명령이 내려지자, 롭슨은 1951년 1월 5일에 조지 루 박사 부인(그레이스 루)과 함께 군용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롭슨은 피난민들의 건강을 돌보면서 서울위생병원 부산 분원을 설립하는 일에 일조하였다. 한편 1951년 1월 26일에 제주도 성산포(성산 서초등학교)에 서울위생병원 성산포 분원이 개원되었고, 롭슨은 이곳에도 파견되어 간호사로 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간호교육을 실시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롭슨은 제주도 분원 시절에 2,600여 회의 방문 간호 및 31,596명에게 예방주사를 실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병원 지도자들은 1951년 7월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서울위생병원 사업을 재개하였다. 롭슨도 서울로 올라와 간호부장 겸 간호원 양성소 교장으로 봉사하였다. 롭슨은 1953년에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1954년 7월 9일에 양녀로 맞이한 패르티샤와 함께 다시 한국에 돌아와 사역을 계속하였다. 그해 9월에는 전쟁 중 폭격으로 소실된 간호원 기숙사를 재건하였는데, 이 일에 롭슨도 기여하였다. 이처럼 서울위생병원 및 간호원 양성소 발전을 위해서 헌신하던 롭슨은 개인의 사정에 의해 1955년 8월 16일에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므로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마무리했다.
[참고자료] 「교회지남」 1947년 8월호, 16; 1947년 9월호, 16; 1951년 12월호, 74-78; 1954년 9월호, 48; 1954년 11월호, 52; 1955년 10월호 50; Review and Herald, December 7, 1950, 17; January 25, 1951, 17; February 8, 1951, 24; May 10, 1951, 16; November 29, 1951, 15;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