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첼은 1921년 12월 3일 출생했다. 그는 1947년에 한국 선교의 부름을 받고 그해 4월 15일 조지 루, 제임스 리와 함께 내한하였다. 미첼은 서울위병원장이었던 조지 루의 사위로서 신학교 캠퍼스 건설 책임자로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조선합회는 1947년 9월에 회기동교회 날개방에서 조선합회신학교를 다시 열고 사역자 양성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미첼 부인은 이 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조선합회는 신학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학교 부지 확보 및 캠퍼스 건축을 추진하였는데, 미첼은 1947년 가을부터 제임스 리와 함께 캠퍼스 부지를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48년 7월에 현재의 삼육대학교가 있는 태릉의 부지를 구입하였고, 이듬해인 1949년 11월 13일에 학교를 이전하고 본격적인 삼육동 시대를 열었다.
미첼은 태릉에 학교 건축 사업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그는 미군으로부터 빌린 불도저를 직접 운전하여 육군사관학교 입구에서부터 학교까지 길(1.5 마일)을 닦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이런 그의 헌신을 보고 학교 구성원들은 그 길을 미첼 로드(Mitchell Road)로 명명하기도 했다. 아울러 제임스 리 원장과 함께 농장에 사용할 물을 확보하기 위해 호수(제명호)를 만들었다. 이처럼 학교 부지에 교실, 기숙사, 행정관 등을 건립하였고, 목공장, 철공장, 실업부 사무실 등을 건축한 미첼은 새로 건립된 학교에서 실업부 책임자로 사역했다. 그는 농장에 작물을 재배하고 젖소를 사육해 우유를 생산하는 일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미첼 부부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나자 미첼은 1953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삼육신학원으로 명명된 학교의 교사 및 공장으로 사용될 강당을 건축하여 교육 사업을 재개하는데 일조했다. 그는 1954년 2월에 한국연합회 평의원회에서 삼육신학원 총무 및 실업부 책임자에 임명되어 교육 사업을 지원하였다. 특별히 미첼이 책임을 맡은 농장에서는 각종 채소, 달걀, 우유 등이 생산되었는데 특약을 맺어 재한 외국인 가족들에게 공급되는 등 품질을 인정받았다. 미첼의 책임 아래 운영된 삼육신학원 농장 사업은 1955년 이후 전국의 교육자들과 사회의 유지들이 견학을 하는 대표적인 명소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삼육신학원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하던 미첼은 1958년 4월 26일 한국을 떠나 영구 귀국하였다.
귀국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미국 태평양연합회 기관지인 「패시픽 유니온 리코더」(Pacific Union Recorder)에 따르면 그는 1985. 07. 11에 사망했다.
[참고자료] Pacific Union Recorder, Jan 6, 1986; 「교회지남」, 1947년 5-6월호, 16; 1949년 12월호, 64;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 오만규.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James M. Lee, Our Country, Our College, Seoul: Sahmyook University Press,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