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제임스 밀톤

James Milton Lee
1938. 10-1940. 11. 23 / 1947. 04. 15-1957. 10. 15
1912. 09. 21-2013. 06. 01
미국, 교사, 목사
이제명(李濟明)
제임스 리는 하워드 리(Howard M. Lee)와 캐리 스코트 리(Carrie Scott Lee)가 순안 의명학교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1912년 9월 21일에 평안남도 순안에서 태어났다. 순안에서 성장한 그는 1920년에 부친이 의명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일시 귀국할 때까지 선교사 자녀로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제임스 리는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상하이에 있는 극동 아카데미(Far Eastern Academy)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중등교육을 마친 후, 제임스 리는 193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서던 캘리포니아 주니어 칼리지(Southern California Junior College)에서 공부했다. 1934년에 패시픽 유니언 칼리지(Pacific Union college) 신학과에 입학한 그는 1937년 5월에 신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에서 마거리트 시글링거(Marguerite Siglinger)와 결혼한 제임스 리는 대총회로부터 한국 선교에 대한 제안을 받고 어릴 적 성장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마운틴뷰에 있던 패시픽 출판소에서 출판 전문가로 약 1년간 교육을 받은 뒤 1938년 10월에 정식 선교사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돌아온 제임리 리의 첫 사역은 한국 재림교회 출판소인 시조사 총무로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출판부 서기로서 사역을 하고 있던 길리스(I. E. Gillis)가 은퇴를 1년 연장하게 됨에 따라, 제임스 리는 그 기간 동안 순안중학교의 실업부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런 후 그는 1939년 10월에 서울로 돌아와 조선합회사역자양성소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40년 2월에 길리스가 은퇴를 하자, 그는 공식적으로 시조사 총무로 부임했다.

  시조사 총무로서 시작한 그의 선교사로서의 사역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일본은 1940년에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계획하면서 미국인 선교사들을 모두 철수하게 했다. 이로 인해 제임스 리는 필리핀으로 전근되어 1940년 11월 23일에 한국을 떠났다. 그해 11월 30일에 마닐라에 도착한 그는 한 달 후에는 필리핀 중부 일로일로(Iloilo)에 도착하여 웨스트 비사얀 아카데미(West Bisayan Academy)의 교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에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급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필리핀을 정복하였다. 그 이듬해인 1942년 4월에 일본은 비사얀 아카데미가 있는 일로일로를 점령했다. 이 시기에 제임스 리는 라디오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일로일로 시립교도소에 3개월간 수감되었다. 1942년 7월 25일에 그는 일로일로로 이송되었고, 1943년 6월 16일에 산토 토마스로 재이송되었다. 이렇게 그는 감옥에서 3년을 보냈다. 이 고난의 삶이 막을 내린 것은 1945년 2월 23일이었다. 당시 필리핀은 더글라스 맥아더(Duglas MacAthur) 장군이 이끄는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제임스 리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제임스 리는 호놀룰루를 거쳐 캘리포니아주 샌페드로에 도착하였고, 그의 포로 수용소 생활은 마무리되었다. 필리핀에서의 구금에서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온 제임스 리는 워싱턴 주 왈라왈라대학(Walla Walla College)에서 성경 교사 자리를 제안받았다. 그는 1945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 그 대학에서 성경교사로 일했다. 그는 주로 성경을 가르쳤고, 의료 선교를 위해 의학도 공부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육 사업을 위한 선교사 요청을 받게 되면서 의료선교사의 꿈을 접고 교육선교사로서 한국으로 다시 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947년 4월에 조지 라이(George Rye), 릴랜드 미첼(Leland Mitchell)과 함께 미국을 떠나 내한하여 교육 선교를 재개하였다. 제임스 리는 해방 후 1947년 9월 1일에 재개교한 조선합회사역자양성소의 교사로 임명되어 여섯 개의 신학 과목을 강의했다. 그러나 그 사역자양성소는 열악한 교육시설과 환경으로 인해 1년 만에 다시 문을 닫았다. 제임스 리는 사역자양성소의 교육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안정된 교육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인 지도자였던 이여식 목사와 함께 교육기관 건립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1947년 11월에 태릉 근처에 있는 한 장소를 찾아내었고, 조선합회 지도자들은 그해 11월 26일에 그 지역에 대학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8년 7월에 7천 달러를 지불하고 현 삼육대학교 부지 약 175에이커(22만 평방미터)의 땅을 구입했다. 이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임스 리는 1947년 9월 서울 면목동에 설립된 경성삼육원 교장에 임명되었다. 삼육신학원 교사이자 삼육중학교 교장이 된 그는 태릉에 마련된 부지에 학교 시설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하워드 리는 미첼(K. L. Mitchell, 민제일) 선교사와 함께 태릉 부지에 교실, 기숙사, 사택, 사무실 등의 시설들을 지었다. 건축 비용은 대총회 지원금 35,000달러를 포함해 총 85.000달러가 소요되었다. 태릉에서 캠퍼스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에 폐쇄되었던 사역자양성소가 1949년 10월 18일에 회기동 본부교회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그 사역자양성소가 재개된 직후에 태릉에 캠퍼스가 완공되자, 사역자양성소의 교수이자 삼육중학교 교장이었던 제임스 리는 두 학교를 태릉에 있는 새로운 캠퍼스로 옮겨 본격적으로 교육 사업을 추진하였다.

  태릉에 정착한 후 1950년 5월에 사역자양성소와 삼육중학교가 한국 주니어 칼리지(Korean Junior College)로 통합되었고, 초대 학장에 제임스 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한 달 후인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서 학교는 다시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전쟁 발발 후 제임스 리를 비롯한 모든 선교사들은 일본으로 잠시 철수하였다. 그러나 교육 사업을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1951년 3월 11일에 제주도 성산포에서 주니어 칼리지의 피난 학교가 임시로 운영되었다. 제임스 리는 제주도로 건너와 피난 학교를 운영하였고, 전쟁이 진정되자 1951년 11월 피난 학교를 다시 태릉으로 옮겨 교육 사업을 재개하였다. 그때 학교 명칭을 삼육신학원으로 개칭하고 제임스 리는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다.

  제임스 리는 1953년 5월 휴가를 맞아 미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삼육신학원 원장 및 실업부 총무를 지냈다. 이 시기에 그가 가장 특별하게 한 일은 삼육대학 터 뒷산 계곡에 저수지를 만든 것이었다. 1953년 봄에 그는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미군으로부터 불도저 4대를 빌렸고, 농장에 물을 대기 위해 20피트 길이의 배수관을 설치했다. 이 저수지는 아름다운 호수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삼육대학교는 이 호수를 제임스 리의 한국 이름을 따서 제명호로 명명하였다. 1953년 춘계 행정위원회에서 한국연합회(Korean Union Mission)는 제임스 리의 휴가를 결정했다. 그의 후임으로 클린턴 리(Clinton M. Lee, 이시화)가 삼육신학원장을 맡았고, 1954년 2월 15일에 정동심이 원장 업무를 인계받았다. 그리고 그해 8월 25일에는 제임스 리의 동생으로 역시 한국의 순안에서 태어나 성장했던 도널드 리가 선교사로 합류해 형의 뒤를 이어 삼육신학원장을 맡았다.

  휴가차 미국으로 돌아온 제임스 리는 1953년 9월에 미국 앤드류스대학교 부설 재림교회 신학대학원(Adventist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해 1954년 8월에 신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신학대학원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온 제임스 리는 한국연합회 교육부와 목회부 서기 및 예언의 소리 성경통신학교 책임자로 임명되어, 선교 및 행정 업무에 참여하였다. 한국연합회의 행정자로 사역하는 동안, 그는 『정로의 계단』, 『시대의 소망』, 『각 시대의 대쟁투』를 번역하였다. 그는 또한 라디오 방송 사업과 같은 문화선교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헌신적인 선교 사역은 1957년 말에 필리핀 마운틴뷰대학(Mountainview College)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한국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임스 리는 그 대학에서 1960년까지 약 3년간 대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별히 그는 그 대학을 2년제에서 4년제로 바꾸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1960년에 4년 과정의 대학 운영이 인가되었다.

  그 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재임스 리는 앤드류스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박사 학위(Ed.D.)를 받았다. 교육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1962년에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Southern California University)에서 신학박사(Ph.D.) 과정을 시작하여 1966년에 “엘렌 화이트가 교육에 끼친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한 제임스 리는 미국으로 영구 귀국한 뒤에도 수시로 한국을 방문해 삼육대학교의 발전을 격려하였다. 2006년에 삼육대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이했을 때, 그는 자서전인 『우리나라, 우리 대학』(Our Country, Our College)을 출간해 삼육대학교에 헌정했다. 이처럼 한국을 끝까지 사랑했던 제임스 리는 2013년 2월 19일에 101세의 나이로 주님 품에 잠들었다. 삼육대학교는 2013년 6월 1일에 그의 헌신적인 선교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학 캠퍼스 내 오얏봉 언덕 아래에 그의 기념비를 세웠다.

[참고자료] 「교회지남」, 1940년 3월호; 1941년 2월호; 1947년 5-6월호; 1949년 12월호; 1951년 7월호; 1954년 10월호;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 「삼육대학보」, 2012년 6월 10일; Yearbook of the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53; James M. Lee, Our Country, Our College, Seoul: Sahmyook University Press,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