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드웰은 1897년 6월 15일 독일에서 출생하여 유럽지회(Europe Division) 소속으로 사역을 하다가 1924년 3월에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퍼드웰은 1925년 5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4회 총회에서 전도사 신임서를 받고 남선미션(South Chosen Mission) 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의 부인은 선교인 증명서를 받고 여선교인으로 함께 사역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에 퍼드웰은 전라북도 정읍에서 활동하면서 정읍교회를 개척하였다. 이듬해인 1926년 5월에 경산에서 부두열은 남선미션 연회에서 청소년부 서기로 임명되어 남선미션 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에 집중하였다. 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에 집중하던 퍼드웰은 1928년 4월 21일에 개최된 남선미션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이듬해인 1929년 6월에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 제6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총회에서 남선미션은 남선대회로 명칭이 조정되었고, 퍼드웰은 남선대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한국에 온지 만 7년이 지난 1931년 6월에 퍼드웰은 안식년을 맞이해 독일로 돌아갔고, 그의 직책은 같은 독일 출신의 선교사인 바르(Ernest W. Bahr)가 대신 맡았다. 퍼드웰은 1년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남선대회 책임자로 계속 사역을 이어갔다. 1930년대 초에 한국 재림교회는 세계적인 경제적 대공황의 여파로 긴축 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합회는 3개 대회의 조직들을 축소하고, 그 대신에 지방의 조직을 3개 대회에서 5개 대회로 분할하는 결의를 했다. 이 결의에 따라서 남선대회는 영남대회와 호남대회로 분리되었고, 퍼드웰은 경산을 본부로 둔 영남대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경상남북도에서의 선교 사역에 집중하였다. 대회의 책임자로서 퍼드웰은 조선합회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1934년 4월에 부산에서 대형 천막전도회를 개최하고 20여 일 동안 직접 강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이렇게 경산에 머물면서 영남지방 미션 조직의 책임자로 활동하던 퍼드웰은 1935년 5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9회 총회에서 서선대회장에 임명되어 순안에 거주하면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선교를 지도했다. 그가 서선대회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순안 의명학교에서 신사참배 논쟁이 발생하였는데, 퍼드웰은 신사참배를 수용한 조선합회 지도자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1937년 4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10회 총회에서는 조선합회 선교부 서기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조선합회의 선교부 책임을 맡은 그는 그해 11월에 평안남도 용강군 구룡리교회에서 자급전도사 수양회를 개최하는 등 전국의 선교 사역을 지도하였다. 아울러 1938년 1월에는 송호리교회에서 연합 사경회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9년 중반에 안식년으로 1년 동안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1940년 9월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퍼드웰은 선교부 서기의 직책을 계속해서 수행하였다.
1940년대 들어서 일제의 태평양 전쟁 획책으로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에 퍼드웰은 1941년 2월에 필리핀으로 떠났다. 필리핀에 있는 동안 그는 일본에 의해 수감되었다가 1945년에 일본의 패망으로 풀려난 후 1946년에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 미국에서 형제자매들과 생활하던 퍼드웰은 1966년 1월 2일에 캘리포니아주 스톡톤에서 사망했다.
[참고자료] “Obituries-Pudewell,” Pacific Union Recorder April 18, 1966; Far Eastern Division Outlook, 1924-1966; Year Book of the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30;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 「교회지남」, 1924-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