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쓰는 서캐나다연합회(Western Canadian Union)에서 사역하던 중 1922년 9월 26일에 대총회 제46회 총회 사무위원회에서 조선합회 선교사로 배치되었고, 그 배치 결정에 따라서 1923년 2월 7일에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한국에 입국한 후 남선미션에 배치된 배쓰는 미션 본부가 있는 경산에서 조선어 공부를 하면서 선교를 준비하는 도중에, 1924년 6월 17일에 순안ㅍ의명학교에서 개최된 조선합회 제3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배쓰는 이 총회가 마치는 6월 22일에 전도사 증명서를 받았고, 부인은 선교인 증명서를 받았다. 이후 남선미션에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참여하였는데, 1924년 4월에는 경산교회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서 천막전도회를 인도하였고, 1924년 9월에는 동래에서 3주간 천막전도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배쓰는 1924년 9월 14일에 경산교회에서 개최된 남선미션 연회에서 사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내한 초기 남선미션에서 활동하던 배쓰는 1925년 5월 29일부터 6월 6일까지 서울 회기동의 동명소학교에서 개최된 조선합회 제4회 총회에서 조선합회의 선교부 및 출판부 서기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부인이 질병으로 순안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1925년 12월 13일에는 상해로 옮겨 위생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상태가 호전되어 1926년 4월 13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배쓰는 1927년 6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5회 총회에서도 선교부 및 출판부 서기로 유임되었다. 그러나 남선미션 감독이었던 정문국 목사가 1927년 12월 21일자로 사직함에 따라, 조선합회는 1928년 3월에 개최된 춘기 사무위원회에서 배쓰를 남선미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남선미션 감독에 임명된 배쓰는 그해 4월 21일에 개최된 남선미션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남선미션의 감독으로서 행정가가 된 배쓰는 남선미션 지역의 선교 확장을 위해서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그의 활동 내용은 1929년 6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6회 총회 보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총회가 마친 후인 그해 6월 30일에 배쓰는 안식년을 맞이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배쓰는 다른 한국 대표들과 함께 1930년 5월 29일부터 6월 12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총회 제42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1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7회 총회에서 서선대회장이 임명된 배쓰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했지만 부인의 건강 상태가 나빠져 돌아오지 못하고 한국 선교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1931년 배쓰는 위싱턴주 어번(Auburn, Wash.)에 있는 어번 아카데미(Auburn Academy)에서 교사로 사역하였다.
[참고자료] General Conference Committee, 1922 (GCC1922), 233; General Conference Committee, 1931 (GCC1931-03b), 13; 『교회지남』, 1923년 3월호, 15; 1923년 7월호, 8, 12; 1924년 4월호, 30; 1924년 5월호, 30; 1924년 9월호, 31; 1925년 7월호, 48; 1927년 7월호, 48; 1928년 4월호, 21, 28; 1928년 6월호, 30; 1929년 8월호, 19-21; 1931년 2월호, 6, 7; 1931 Year Book of the Seventh-day Adventust Denomination.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