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리는 1893년 3월 3일에 미시간주 배드포드의 재림교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5년에 앤드류스대학교(Andrews University)의 전신인 엠마뉴엘선교대학(Emmanual Missionary College)에 입학해 2년간의 신학 교육을 받았다. 2년 후인 1917년에 알칸사스에서 안수목사로 사역을 하던 클린턴 리는 한국 선교에 대한 부름을 받고 1920년에 그의 아내(Grace Mabel Wright Lee)와 함께 내한하였다.
클린턴 리는 1921년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2회 총회에서 남선미션(South Chosen Mission)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남선미션은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을 관할하였기 때문에, 그는 남선미션의 본부가 있던 경상북도 경산에 거주하여 1927년까지 지역 미션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에 클린턴 리는 그곳에서 세 아들, 로버트(1921), 도널드(1922), 브루스(1926)를 낳았다.
그는 1927년에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으로 돌아와 엠마뉴엘선교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1928년 10월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 직후 클린턴 리는 순안 의명학교에 개설된 신학교의 주임교수로 임명되었다. 1917년에 설립된 신학교는 2년 과정으로 운영되었는데, 1927년 4월부터 1년간 폐교되었다가 그가 귀국한 직후인 1928년 10월 10일에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한국 재림교회의 교육 사역에 참여했던 클린턴 리는 주임교수로 부임하자마자 신학 교육과정을 구축하고, 각 교과목에 해당하는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를 직접 편찬하였다.
조선합회는 1931년 1월에 개최된 제7회 총회에서 신학교 과정을 서울로 옮기기로 결의하였다. 따라서 클린턴 리는 그해 4월 6일에 신학과 교수들과 함께 목회자 양성과정을 서울 회기동에 있는 합회 본부 건물로 옮기고, 학교를 “조선합회신학교”로 명명하였다 그 신학교의 원장은 조선합회장인 오버그(Harold A. Oberg)가 겸임하였고, 클린턴 리는 부원장 겸 주임교수로 임명되어 신학교를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그의 아내 그레이스 리(Grace Lee)도 신학교의 교사로 봉사하였다.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한 뒤, 9월 20일부터 40일간 경성공회관에서 대전도회가 개최되었는데, 클린턴 리는 신학생들과 함께 이 전도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밀어닥친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조선합회신학교는 서울로 이주한 지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 후 1933년부터 통신학교 형태로 신학교육을 대체하였는데, 클린턴 리는 그 통신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어 1936년 말까지 통신 과정으로 신학교육을 진행하였다. 이 시기에 운영된 통신 교육은 한국 재림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육기관으로 역할을 했다. 클린턴 리는 신학교육의 대안 프로그램으로 통신 과정이 유용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그 모든 상황들을 한국 재림교회 기관지인 「교회지남」에 소개하였다.
이렇게 통신학교 형태로 운영되던 신학교는 1937년 4월 12일에 “조선합회사역자양성소”로 재개교되었다. 이에 조선합회는 그해에 개최된 총회에서 클린턴 리를 사역자양 성소의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클린턴 리는 신학 교육을 위해 봉사한 지 10여년 만에 그 기관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조선합회사역자양성소장에 임명된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역은 신학 교육을 이끌어갈 본방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의 지도 아래 신학교육을 이끌던 이여식과 이성의는 선교사들의 철수 후에 신학교육을 이끈 중심인물들이 되었다. 이처럼 클린턴 리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클린턴 리의 행정적 리더십 아래서 운영되었던 조선합회사역자양성소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의 종교탄압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940년에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아시아에 있는 모든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이로 인해 1940년부터 주한 미국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조선합회사역자양성소장이었던 클린턴 리는 1941년 2월 26일에 필리핀 마닐라로 전근되어 한국을 떠났다. 그는 필리핀에서 사역하던 중 일본의 점령 이후에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일본의 패전 후 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51년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에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는 클린턴 리를 한국연합회장(Korean Union Mission)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해 9월 11일에 귀국하여 부산과 제주도로 옮겼던 한국선교 본부를 서울로 다시 이전하였다. 1952년 5월에 청주에서 한국연합회 제16회 총회가 개최되었고, 그 총회에 앞서 한 달간 대전도회가 청주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연합회장에 임명된 클린턴 리는 그 전도회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 그 후로부터 약 6년 동안 한국연합회장을 역임한 클린턴 리는 1957년 7월 29일에 27년간의 선교사 활동을 마치고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동안, 그는 둘째 아들인 도널드 잃는 아픔을 겪었다.
선교사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교회요람』(Church Manual)을 한글로 번역했고, 『목회요람』(Pastoral Manual)도 번역해 보내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한국연합회는 1961년과 1964년에 그 두 권의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한국어로 출간된 서적들을 앤드류스대학교 도서관에 비치하여 한국 재림교회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말년의 삶에도 한국 선교를 지원했던 그는 1982년 8월 27일에 캘리포니아주 치코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참고자료] “Obituary-Lee, Clinton W.” Adventist Review, Nov. 18, 1982; Yearbook of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1922.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22; Yearbook of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1958.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58. 「교회지남」 1932년 6월호; 1932년 10월호; 1937년 6월호; 1941년 7월호; 1957년 7월호; 1970년 1월호. 이국헌. 『삼육대학교100년사』. 서울: 삼육대학교출판부, 2008; 이영린. 『한국 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