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루는 1899년 6월 27일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알라메다(Alameda,Calif.)에서 헨리 피터 루(Henry Peter Rue)와 화니 엘리지베스 루(Fanny Elizabeth Rue) 사이에서 두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오클랜드 근처에 있던 태평양출판사(Pacific Press Publishing Association)에서 화가로 일했다. 조지 루는 로렐우드 아카데미(Laurelwood Academy, 1913-1914)와 마운틴뷰 주니어 아카데미(Mountain View Junior Academy, 1914-1916)를 다녔고, 1916년에 패시픽 유니온대학(Pacific Union College)에 입학해 1920년 그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로마린다 의료전도자대학(College of Medical Evangelists in Loma Linda, 현 로마린다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조지 루는 의과대학 1학년을 마친 후, 1921년 6월 19일에 메이 벨 에임스(Mae Belle Ames)와 결혼했으며 나중에 두 자녀, 베티 제인(Betty Jane, 1923)과 조지 헨리 2세(George Henry II, 1925)를 낳았다. 그는 1924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캘리포니아주와 워싱턴주에서 개업했다.
조지 루는 1929년에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에서 의료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가족들과 더불어 내한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그는 러셀(Riley Russell, 노설)에 의해 설립된 순안병원에서 의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순안으로 이주했다. 그는 순안에서 2년 동안 의료선교사로 봉사하면서 언어와 관습을 배웠다.
1931년 2월에 개최된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 평의원회에서 재림교회 지도자들은 서울에 재림교회 병원을 세우기로 결의하였고 순안병원장이었던 조지 루에게 책임을 맡겼다. 조지 루는 1931년 가을에 서울 장곡천에 진료소를 설치하고 의료 사업을 시작했다. 몇 개월 후에 그는 서울 회기동에 있는 조선합회 본부에도 진료소를 설치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 진료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932년 11월 초에 그는 서울의 재림교회 진료소를 탑골공원 옆인 인사동 136번지로 옮겨 경성요양의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의료 사업을 추진하였다. 순안병원과 경성요양의원의 책임을 맡은 조지 루는 순안과 서울을 왕래하면서 의료 사역을 전개하였다. 그는 3,800여 만 원의 재정을 투입하여 경성요양의원에 자외선 치료, 전광욕, 수치료 등의 시설과 병상 9개를 갖추고 수준 높은 의료 진료를 실시하였는데, 윤치호와 같은 조선의 유명인들도 진료를 받을 정도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입원실과 수술실을 확대할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병원 건축을 추진하였다.
조지 루는 1933년 3월 22일에 동대문 밖, 휘경동에 20에이커(1만 2천 평)의 땅을 구입한 후, 1934년부터 병원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건축 재정은 대총회와 원동지회의 지원금 및 한국의 의료 사업을 지원한 개인들의 후원금으로 확보되었다. 1936년에 병원 건축이 완성되어, 그해 2월 1일부터 경성요양병원이라는 명칭으로 진료가 시작되었다. 그의 아내 메이 류는 초창기부터 수간호사로 병원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경성요양병원이 개원되고 본격적으로 병원 사업이 전개되던 1936년 말에 병에 걸려 12월 16일에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그녀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 묘지에 안치되었다. 부인이 사망한 지 6개월 후에 조지 루는 안식년을 맞이해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년의 안식년을 마치고 1938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온 조지 루는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성요양병원을 다시 정상화시켰다. 그는 한국에서 치료한 100여 명의 외과 환자 수술 기록을 토대로 논문을 제출하여 미국외과협회 정식회원(Fellow of American College of Surgeons)으로 추대되었다.
이 무렵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획책하면서 한국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조지 루는 1941년 2월 16일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태평양전쟁 기간동안 그는 자녀들이 있는 로스앤젤레스 교외 지역인 몬테벨로(Montebello)에서 의사로 일했다. 경성요양병원장은 한국인 의사인 정사영 의사가 맡았다. 일제의 종교탄압이 심해지면서 1943년 12월 28일에 한국 재림교회는 해산되었고, 경성요양병원은 매각되어 친일 유지들의 요양원인 서광장으로 운영되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조지 루는 그레이스 질다 레아(Grace Zilda Lea)를 만나 1946년 10월 31일에 그녀와 재혼했다. 그 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해방된 한국에서 선교사 요청을 호소하자, 그는 아내와 함께 경성요양병원 재건을 위해 서울로 돌아왔다. 조지 루는 병원을 다시 되찾고 시설들을 확충하여 1947년 5월에 138개의 병상을 갖추고 병원 이름을 서울위생병원(Seoul Adventist Hospital)로 바꾼 후 병원 운영을 정상화시켰다. 이 시기에 서울위생병원은 우수한 병원으로 인정받았으며, 유제한 의사는 미국 외교관들과 이승만 대통령 내외의 주치의로도 활동했다.
1950년 6월에 조지 루는 대총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가 태평양을 건너고 있을 때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했고, 그의 아내인 그레이스 루 여사를 포함해 모든 선교사들은 6월 27일에 일본으로 피난했다. 서울이 함락되고 서울위생병원은 인민군 전용 치료병원이 되었으나 3개월 후에 서울이 수복되고 병원 운영을 정상화해야만 했다. 한국 정부의 간절한 요청을 받은 조지 루는 1950년 10월에 미국 대사와 함께 서울로 돌아와 서울위생병원을 복구하였다. 다행히 그가 순안에서 치료해주었던 북한 장교의 지시로 병원의 의료 시설들은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1950년 말에 서울이 다시 북한군에 의해 함락될 상황에 처하게 되자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과 거제도와 제주도로 피난했다. 조지 루는 미군과 협력하여 시민들을 안전하게 피난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한강 다리가 폭파되기 직전 자신도 최후로 피난길에 올라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민들을 위한 병원 운영을 조지 루에게 요청하였고, 그 요청에 응해 1951년 3월 15일에 부산시 서구 부용동에 서울위생병원 부산 분원을 개원하였다. 그 후 제주도 성산포에서도 분원을 개원하였다. 조지 루와 의료진들은 하루 평균 150-200명의 환자들을 돌보았다. 유엔군에 의해 서울이 회복되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자 그는 1951년 6월에 서울로 돌아와 위생병원 재건 및 복구를 서둘렀다. 그는 미국에서 10만 달러의 재정을 지원받아 병원을 복구하고 의료 사역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그레이스 루 여사는 13명의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서울위생병원 내에 고아원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루는 서울위생병원의 도움으로 1952년 8월에 양주군 구리면 상봉리에 9800평의 부지를 구입하여 고아원 시설을 짓고 성육원(서울위생병원 부속)이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고아원을 개설하였다. 이 고아원은 그레이스 루 원장의 헌신적인 봉사로 1964년까지 약 700명의 아동들을 돌보았다. 그녀는 1967년 미국으로 영구 귀국할 때까지 이 고아원 원장으로 봉사했다.
아울러 그녀는 1955년 8월에 라보순(Irene Roboson) 간호사가 영구 귀국하게 되자 서울위생병원 간호부장 및 간호고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1957년 12월까지 봉사하였다. 이런 헌신적인 사역에 힘입어 그녀는 1963년 4월 6일 제12회 세계보건일에 보건사회부장관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조지 루 원장도 1954년 3월 9일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장과 문화훈장을 수여받았고, 그해 10월 3일에는 모교인 로마린다 의과대학 동창회로부터 모범 동창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55년에 안식년을 맞이하여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967년까지 서울위생병원장과 한국연합회 의료부장으로 봉사하였다. 그의 헌신적인 의료선교 사역으로 인해 그는 1959년 10월에 대한민국 공보부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63년 10월에는 중앙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 1965년 2월에는 수도의과대학에서 명예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6년 3월 16일에는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명예 서울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1929년에 의료선교사로 내한해서 일제 강점기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30년 이상 의료사역에 헌신한 조지 루는 1967년 7월 1일 공적인 사역에서 은퇴하면서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 은퇴 후 미국 서부지역에서 그의 아내 그레이스 루 여사와 함께 건강한 삶을 살던 조지 루는 1993년 10월 18일에 94세의 나이로 사망해 워싱턴 주 노들랜드(Northland)에 있는 사운드뷰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헌신적인 한국에서의 의료 사역을 기리기 위해 서울위생병원은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1936년에 사별하여 묻힌 그의 전 부인 곁에 조지 루 의사의 묘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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