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길리스는 1874년 3월 15일에 캐나나 온타리오(Ontario, Canada)에서 태어났다. 1900년에 헬렌 채드윅(Helen Chadwick)과 결혼한 그는 이듬해인 1901년에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위치한 패시픽 출판소(Pacific Press Publishing Association)에서 인쇄인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10년에 중국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길리스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중국합회(China Union Mission)의 서기 겸 회계로 임명되었다. 그는 본부 건물의 설계 및 건축을 지휘하였고, 출판사 총무도 역임하였다. 그 후에 길리스는 중국 강시성에서 개척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917년 길리스는 북중국합회의 재무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그는 싱가포르에 출판사를 세웠고, 그 출판소의 총무로 임명되었다. 그 후에는 중국 북부에 위치한 산시성에 있던 대회(Mission)의 감독에 임명되어 행정자로 활동하였고, 동중국합회(East China Union)의 가정선교부 서기로 얼마 동안 봉사하기도 했다.
길리스가 한국 선교를 위해 내한한 것은 1927년 6월이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얼 우드의 귀국으로 공석이었던 시조사 총무로 임명되어 1928년 5월까지 출판 사업을 담당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갔던 길리스는 원동지회 평의원회의 결의에 따라 1930년 5월에 다시 시조사 총무에 선임되었는데, 이는 그해 1월 24일에 화재로 전소된 시조사의 재건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길리스의 헌신으로 시조사는 화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창립 20주년을 맞이한 1931년에 당시 최고의 인쇄설비를 갖춘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정년 은퇴할 때까지 시조사 발전을 위해서 출판사 총무로 헌신하였는데, 그가 사역하던 시기에 출판 사업은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1932년에는 시조 발행 부수가 15,000부를 넘어섰고, 『안식일론』, 『다니엘서 연구』, 『묵시록 연구』 등이 출간되었고, 『교회증언』 1권도 번역되었다. 이외에도 「복음총서」 전도지 80만 부가 인쇄되었고, 「현대진리」 전도지는 37호까지 출간되었다. 이외에도 1937년 1월부터는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신철자법”을 채용하여 새 활자를 만드는 등 한국의 인쇄사업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1940년 2월에 정년을 맞이해 시조사 총무에서 은퇴한 길리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내다가 1954년 11월 3일에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에서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아들(이티엘 길리스)과 딸(베르닉 라손)이 있는데, 이티엘 길리스는 1929-1939년까지 약 10년 동안 아버지를 따라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참고자료] Review and Herald, Dec. 30, 1954, 21;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 오만규.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교회지남」 1927년 7월호, 37; 1930년 7월호, 32; 1931년 1월호, 2-4; 1933년 1월호, 18, 19; 1933년 3월호, 24; 1935년 6월호, 28; 1939년 1월호,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