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슨은 1900년 6월 14일에 아이오와주 클라린다(Clarinda, Iowa)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대총회의 결의에 따라 조선합회 권서부 업무를 맡기 위해 1926년 9월 3일에 내한하였다. 당시 권서부(출판부) 서기는 배쓰가 담당하고 있었다. 피어슨은 조선어와 업무를 익히면서 권서부 활동을 조력하던 중 1928년 3월에 배쓰가 남선미션 감독에 임명됨에 따라 권서부 사역을 위해 선교사로 입국한 피어슨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피어슨은 1929년 6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6회 총회에서 권서부(출판부) 전임 서기에 공식 임명되었고,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으로 돌아간 1933년 6월까지 권서부 전임 서기로서 출판 사업을 이끌었다. 그는 출판 사업을 담당한 선교사로서 「교회지남」에 권서 사업을 장려하는 많은 글을 주기적으로 발표하였고, 각 지역 대회와 미션에 속한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출판 사업을 지도하였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1920년대 말에 재림교회 출판 사업을 크게 발전하였다. 그는 1931년에 『권서요결』이라는 책을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출판 사업을 담당하는 선교사로 내한한 피어슨은 1927년 6월에 사무원 증명서를 받았고, 1929년 6월에는 전도사 증명서를 받았다. 그리고 조선합회 제8회 총회 마지막 날인 1933년 2월 11일에 목사로서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정읍, 순안 등에서 출판 사역을 독려하던 피어슨은 「교회지남」 7월호에 실릴 권서부 사업보고를 인쇄소에 넘긴 후, 안식년을 맞이해 그해 6월 18일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피어슨은 귀국 후 로마린다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의사로서 그는 다시 한국 선교를 자원하여 1948년 5월 29일에 내한해 서울위생병원에서 근무하였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던 피어슨은 많은 환자를 치료하였고, 많은 사람에게 침례를 베푸는 등 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이렇게 의료 선교사로서 활동하던 피어슨은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미국 대사관의 조치대로 한국을 떠나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그는 오리건주 로즈버그(Roseburg, Oregon)에 병원을 개업하여 1968년까지 개업의로서 활동하였다. 피어선은 은퇴 후에도 그 지역에서 아내 바네타(Vaneta)와 함께 말년을 보내다가 1987년 9월 12일에 사망했다.
[참고자료] North Pacific Union Gleaner, February 1, 1988, 25; Adventist Review, December 31, 1987, 25; 「교회지남」, 1926년 10월호, 32; 1928년 7월호, 25; 1933년 7월호, 24, 32; 1948년 6월호, 16; 1949년 8월호, 16; 1950년 7월호, 14; 이근화. 『의료 선교 회고』. Los Angeles, CA: 미주시조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