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츠, 랄프 쇼어

Ralph Shore Watts
1926. 03-1941. 02. 26 / 1946. 04-1948. 09. 11
1905. 10. 06-1994. 05. 12
미국, 목사, 행정가
원륜상(元倫常)
왓츠는 1905년 10월 6일에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 아내와 함께 미국에서 간호사로 교육을 받았으며, 유능한 간호사였던 밀드레드(Mildred)와 함께 선교사로 자원하여 1926년 3월에 내한했다.

  한국에 도착한 왓츠는 한국어를 배운 뒤 순안병원의 원장 직무대행으로 첫 사역을 시작하였다. 당시에 순안병원장은 헤이스머(Clyde A. Haysmer)였었는데, 그는 일명 “허시모 사건”에 연루되어 1926년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결과로 순안병원 운영을 책임질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조선합회는 간호사 교육을 받은 왓츠 부부에게 병원장 직무 대행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1926년 9월 12일에 순안병원장이 되었다.

1929년 5월에 한국 재림교회 의료 선교를 책임지기 위해 조지 루(George H. Rue)가 내한하게 되자 순안병원장은 그에게 위임되었다.

  왓츠는 1929년 6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6회 총회에서 선교부 서기로 임명되어 한국 재림교회 선교 사역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는 1937년 4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총회에서 새로운 직임을 맡을 때까지 약 8년 동안 선교부 서기로서 전국적인 선교 사역을 지도하였다. 선교부 서기로서 왓츠가 주로 한 일은 선교 지도자들을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1929년부터 그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선교강습회를 이끌었다. 선교강습회는 각 지역 대회 및 미션마다 매년 3일 동안 개최하는 플랜으로 추진되었다. 그 외에도 자비량 선교사들을 위한 강습회도 수시로 개최하였다. 1936년 여름에 그는 “일대일” 선교운동을 추진하여 모든 교인들이 선교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왓츠가 추진한 다양한 선교활동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전도회는 경성에서 개최된 대전도회였다. 1931년 9월에 서울에서 개최된 경선전도회는 한국 재림교회 역사상 가장 큰 집회 중 하나였다. 선교부 서기로서 그는 그 전도회를 주관했다. 1929년 12월에 왓츠는 선교부 서기로 재임명되었고, 1931년 조선합회 제7회 총회에서는 그 직책과 함께 청소년부 서기의 직책도 맡아 1937년까지 6년 동안 봉사하였다.

  왓츠는 1933년 2월 11일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37년 4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10회 총회에서 중선미션(Central Chosen Mission)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 중선미션은 경기도, 강원도 영서 지역, 충청도를 관할하는 선교 조직이었으며, 선교 본부는 서울에 있었다. 왓츠는 이 선교 지역의 감독이 되어 교회 선교를 지도하였다. 이렇게 2년 동안 중선미션의 책임자로 일하던 그는 1939년 1월에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의 감독으로 일하던 오버그(Harold A. Oberg) 목사가 일본합회(Japan Union Mission)의 서기 겸 회계로 전출됨에 따라 그를 대신해 조선합회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조선합회 감독의 지위에 임명된 왓츠 목사의 주요 과제는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1939년 4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11회 총회에서 전국의 선교지역을 5개 선교 조직에서 4개 선교 조직으로 줄이고 재정적인 독립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조선합회의 감독으로서 그의 활동은 1년 후에 중단되었다. 1940년에 일본은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면서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철수를 강제하였다. 이에 대총회는 한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의 철수를 명령했다. 조선합회 감독이었던 왓츠는 1940년 11월부터 선교사와 그 가족들을 단계적으로 철수시켰다. 그는 1940년 12월에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 연례회의에 참석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1941년 2월 4일에 조선합회 평의원회를 열고 자신이 맡고 있던 감독의 직책을 한국인인 최태현 목사에게 위임하고 2월 16일에 한국을 떠났다.

  일제의 종교적 탄압으로 한국을 떠났던 선교사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1년이 지난 1946년 무렵이었다. 원동지회는 1945년 11월에 열린 총회에서 왓츠를 다시 조선합회장으로 임명했다. 조선합회장에 재임명된 왓츠 목사는 1946년 3월 13일에 귀국하여 4월 초에 조선합회 총회를 개최하고 새로운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등 교회 재건을 지도했다. 한국 재림교회 재건을 위해 지도자들을 선출한 뒤 잠시 미국으로 돌아간 왓츠는 1947년 1월 12일에 다시 돌아와 조선합회장으로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임무는 교단이 해체되면서 매각된 교단의 재산들을 다시 환수하고 각 지역의 선교 체계를 재정비하는 것이었다.

  이 긴급한 임무를 마무리한 후, 왓츠는 1948년 7월에 원동지회의 목회부 서기로 전임되었고, 그의 후임으로 바르(Ernest W. Bahr) 목사가 조선합회장에 임명되었다. 이에 왓츠는 1948년 9월 11일에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이전함으로써 그의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했다. 한편, 왓츠 목사의 부인 밀드레드(Mildred Watts)는 남편이 한국에서 사역하는 기간 내내 순안병원과 경성요양병원에서 간호사로 사역하였다. 그녀는 1936년 4월에 간호학교를 개설하고 그 책임자로 일했는데, 이 학교는 삼육보건대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왓츠 목사는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싱가포르에 본부가 있는 원동지회에서 목회부 서기로 사역했다. 그후 1951년에 그는 미국의 중앙연합회(Central Union Conference)에 속한 미주리합회(Missouri Conference)의 합회장에 임명되어 1년 동안 행정가로 일했다. 1952년에 그는 남아프리카지회장에 임명되어 1958년까지 6년 동안 남아프리카 선교를 지도했다. 그 후에 그는 대총회 서기(General Field Secretary)로 임명되어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대총회에서 일했고,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대총회 부회장으로 봉사했다. 1970년에 은퇴한 후 그는 워싱턴주 노드랜드에서 말년의 생애를 보내다가 1994년 5월 12일에 주님 품에 잠들었다.

[참고문헌] Mid-America Union Outlook, July 1994, ; H. A. Oberg, “Evangelistic Effect in Seoul,” Review and Herald, April 7, 1932.; Spicer, W. A. “Bad News from Korea.” Review and Herald. July 29, 1926; Yearbook of the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49; 1951; 1959; 1964; 「교회지남」. 1926년 10월호; 1929년 8월호; 1930년 1월호; 1931년 2월호; 1933년 3월호; 1936년 6월호; 1937년 5월호; 1939년 3월호; 1948년 9월호; 1954년 10월호;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유영순. 『회고록』. 서울: 시조사, 1984;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 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