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는 1897년 4월 17일 독일 콜버그(Kolberg) 근교의 그로스예스틴(Groß Jesti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알려지지 않았고, 모친 에밀리 바르(Emilie Bahr)는 1945년까지 포메라니아에서 살았으며, 여동생 아이다 바르(Ida Bahr)는 1941년부터 발트프리드 재림교회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근무했다. 젊은 시절 농사일을 하던 바르는 1919년에 독일 프리덴사우(Friedensau) 신학교에 입학해 1921년에 졸업했다. 신학 졸업 후 그는 독일의 여러 교회(Naugard, Regenwalde, Stralsund, Prenzlau, Jagow, Fürstenwalde, Rathenow)에서 목회 사역을 수행했다.
1925년에 독일의 단지그(Danzig)에서 헤르타 포르텐바커(Herta Fortenbacher)와 결혼한 후, 그와 그의 아내는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그해 6월 3일에 내한했다. 한국에서 바르는 전도사로, 바르의 부인은 선교인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신혼이었던 그들은 한국에서 딸(Elfriede, 1927)과 아들(Karl-Heinz, 1930)을 낳았는데, 딸은 디프테리아로 1931년 12월 8일에 경산에서 죽었다. 바르는 1927년까지 충남 지역(청양, 보령, 아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전도회 및 사경회를 지도하였다. 1927년 9월에는 함경북도 청진교회로 발령을 받고 청진, 회령 등에서 교회를 섬겼다. 그러다가 1929년 6월에 경상북도 경산에 본부를 둔 남선미션으로 전근을 하였다. 남선미션에서 사역을 하던 중 1930년 2월 22일에 목사 안수를 받고, 진주, 부산, 제주도 등의 교회들을 방문하여 전도회를 주관하였다.
1931년 6월에 남선대회장이었던 퍼드웰(E. J. Pudewell) 목사가 안식년을 맞이해 독일로 돌아가자 그를 대신해서 남선대회장 대리로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1년 동안 남선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해남교회, 보성읍교회, 진주교회를 개척하거나 조직하였고, 1932년 3월에는 군산교회를 매입하는 등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지도하였다. 1933년 6월에 피어슨(R. W. Pearson) 목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자 그를 대신해서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의 권서부 서기로 임명되었다. 권서부 책임자로서 그는 전국의 권서 지역을 5개 지역으로 개편하고 각 지역마다 책임자를 임명하고, 전국 권서인 수양회를 지도하여 선교 서적을 보급하는 사역을 수행하였다. 바르는 1935년 5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9회 총회에서 권서부장에 임명되어 1940년까지 그 업무를 수행하였다. 아울러 1937년 4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10회 총회에서는 출판부 서기에도 임명되어 두 업무를 책임 맡았으며,
1939년 7월에는 퍼드웰 목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자 그를 대신해 선교부 서기까지 맡아서 1인 3역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헌신적으로 활동하던 바르는 일제의 태평양전쟁 획책으로 모든 선교사들이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어 1941년 2월 25일에 한국을 떠나 필리핀으로 전근했다.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바르 목사는 일제의 필리핀 점령으로 인해 그곳에 억류되었지만 독일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필리핀연합회(Philippines Union Mission)의 출판부 서기로 근무하였다.
필리핀에서 활동하던 바르는 한국이 해방되면서 선교사들이 다시 복귀하게 되어 1948년 5월 20일에 서울로 돌아와 조선합회 부회장 겸 선교부장으로 사역을 재개하였다. 그해 7월에 한국연합회의 회장이었던 왓츠(R. S. Watts)가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 목회부장에 임명되어 한국을 떠나게 되자, 그를 대신해서 바르가 한국연합회장에 임명되었다. 한국 재림교회 사업을 총괄하게 된 바르는 교회 재건을 마무리하고 신학원을 다시 세우는 등 해방 후 한국 교회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6월 27일에 모든 선교사 가족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한국 교인들을 지도하였다. 3개월 후에 서울이 수복되자 바르는 삼육신학원장 제임스 리(James M. Lee)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대총회로부터 기증받은 구호금을 나눠주였다.
그러나 전쟁 상태가 다시 악화되자 바르는 선교사들을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한국 교회 관리 및 지원을 추진하였다. 1951년 1월에 부산과 제주도에 피난민들의 정착지가 마련되자 바르는 일본에서 부산으로 건너와 부산과 제주도에 피난한 재림교인들을 돌본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951년 2월에 개최된 원동지회 춘계 평의원회에서 한국연합회장이 클린턴 리(Clinton W, Lee) 목사가 임명됨에 따라서 바르 목사는 그해 4월에 일본에서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1951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바르는 미국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후 미국에서 생활했다. 그는 약 3년 반 동안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독일어 회중들을 위한 교회의 목사로 봉사를 했다. 그 후 은퇴하여 말년의 생애를 보내다가 1968년 2월 5일에 캘리포니아주 앵그윈(Angwin, Calif.)에서 사망했다.
[참고자료] Campbell, G. A. “On to Singapore.” Far Eastern Division Outlook, January 1937; “Publishing Department, Far Eastern Division.” Review and Herald, June 17, 1937; Effenberg, J. H. “Missionar Ernst Bahr.” Der Adventbote, May 1, 1968; “Family at Rest.” Gleaner (Northwest Adventists in Action), May 2016; “In Remembrance.” Review and Herald, April 4, 1968; Mills, R. C. “Isle of Refuge in Korea.” Review and Herald, March 1, 1951; Ogle, Mary. “Sabbath September 27: Some Pay More than Dollars.” Missions Quarterly, 1947; Pudewell, Walter. “Ein weiteres Kindergrab im Südkoreanischen Missionsfelde.” Der Adventbote, April 1, 1931; “Sad Word from Kaizan.” China Division Reporter, January 1, 1931; Seventh-day Adventist Yearbook.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08-1950.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