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워즈는 1893년 6월 13일에 매사추세츠주 워체스터에서 조지 화이트모어 바워즈(George Whitemore Bowers)와 넬리 페리 바워즈(Nellie Perry Bowers) 사이에서 4자녀 중 셋째로 출생하였다. 그가 세 살 되던 해에 그의 부모는 재림교인이 되었다. 바워즈는 매사추세츠에서 성장했고 사우스 랭커스터 아카데미(South Lancaster Academy)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그는 문서 전도 활동에 참여했다.
1913년 9월 1일에 바워즈는 엘라 메이(Ella Mae)와 약혼을 한 후, 1914년까지 메인주 포틀랜드에 있는 메인합회(Maine Conference)에서 회계 분야의 행정보조원으로 일했다. 한편 약혼녀였던 엘라 메이는 사우스 랭커스터 아카데미에서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한 후 1914년에 졸업했다. 그녀는 레오민스터 재림교회학교(Leominster Adventust Church School)에서 교사로 일했다.
1916년 초에 바워즈는 대총회로부터 아시아 지역의 선교사로 지원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는 1916년 6월 1일에 엘라 메이와 사우스 랭커스터교회에서 결혼한 후, 8월 1일에 아시아지회(Asiastic Division)가 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 그곳에서 바워즈는 재림교회 출판사의 재무로 사역을 시작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17년 4월에 그는 동아시아연합회(East Asian Union Conference)의 서기 겸 회계로 임명되어 서울로 이주했다.
1917년 여름에 서울에 도착한 바워즈는 조선대회(Chosen Conference)의 서기 겸 회계를 겸임했다. 그해 12월 1일에 바워즈 부부는 서울에서 첫째 딸(Naomi)을 낳았다. 그후 1922년 1월 5일에 둘째 딸(Elizabeth Marie)을 낳았는데, 출산 후 부인이 병을 얻어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 요양병원(Washington Sanitarium)에서 수술을 받고 2년 동안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그후 부인의 건강이 회복되자 바워즈는 1924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조선합회 서기 겸 회계의 직책으로 복귀했다.
2년 후인 1926년에 바워즈는 의명학교 실업부 책임자 임명되어 서울에서 순안으로 옮겼다. 그는 순안 의명학교 내에 있던 농장, 과수원, 목장 등을 확장시켜 학교의 경제적인 안정을 도모했으며, 노작교육을 발전시켜 의명학교가 고학생들의 낙원으로 명성을 얻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특별히 그는 식품사업부를 만들어 통밀가루, 옥수수가루, 그라놀라, 포도즙 등을 생산해 한국 전역에 50여 곳에서 판매하였고, 일본과 중국으로까지 판매망을 넓히는 등 식품 사업도 확장시켰다.
이렇게 4년 동안 의명학교 실업부에서 사역을 하던 바워즈는 1930년 1월에 두 번째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바워주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육로로 여행을 해서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930년 5월 말에 개최된 제42회 대총회 총회에 참석한 후 6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 사역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사역을 오래가지 못했다. 1932년 초에 바워즈는 싱가포르에 있는 말레이연합신학교(Nalayan Union Seminary)로 발령을 받고 그 학교의 실업부 책임자로 부임함으로써 한국에서의 15년 사역을 마무리하였다.
말레이 신학교에서 바워즈는 실업부와 인쇄소 책임자로 사역하였다. 그는 한국의 의명학교에서처럼 말레이 연합신학교에서도 실업부를 발전시켜 학교 재정에 기여했으며, 학생들의 노동을 지원했고, 식품 사업을 통해 수익 사업을 운영했다. 그의 아내였던 엘라 메이는 교직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신학교의 교사로 봉사하였다.
1937년 여름에 바워즈는 세 번째 안식년을 맞이해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는 바워즈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출판 사업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총회(General Conference)에 요청하여 매릴랜드에 있는 리뷰사(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나 캘리포니아에 있는 패시픽 출판사(Pacific Press Publishing Association)에서 일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의사소통의 문제로 바워즈는 대형출판사가 아닌 애틀랜틱 유니언대학(Atlantic Union College)에 있는 작은 인쇄소에서 출판 업무를 익혔다. 그 후 그는 원래의 계획대로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위치한 패시픽 출판사에서 몇 달 동안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출판 경력을 쌓은 후 바워즈는 1938년 6월 18일에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1939년에 베트남 사이공에서 몇 달을 지내면서 베트남어 활자를 주조하여 베트남어로 출판물을 만들어 보급했다. 1940년에 바워즈는 영국령 북보르네오에 있는 재림교회 선교기지로 발령을 받고 그곳에 들어가 선교 책임자로 봉사하면서 그해 10월에 두산 훈련학교(Dusan Training School)를 오픈하였다. 바워즈 부부는 보르네오에서 봉사한 지 9개월 만에 모두 말라리아에 걸렸다. 이로 인해 엘라 메이는 1941년 6월 22일에 제셀톤(Jesselton)에서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내가 하망한 후 바워즈는 보르네오에서 사역을 하다가 그해 8월에 구스 영버그(Gus Youngberg)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후 다시 싱가포르의 말레이 출판사(Malayan Press)로 돌아갔다.
1942년 2월에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게 되자 바워즈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피해 그해 4월 미국 뉴올리언즈항으로 귀국했다. 미국에 돌아온 바워즈는 몇 달 동안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매릴랜드에 있는 위싱턴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병에서 회복된 후, 그는 매사추세츠주의 사우스 랭커스터로 가서 아내의 가족들을 만난 후 자녀들이 있는 캘리포니아의 앵그윈으로 돌아왔다. 1942년 여름에 그는 문서전도 활동을 하다가 패시픽 출판소에서 출판 업무에 종사하였다. 1944년 12월 5일에 델핀 캔먼(Delphine Canman)과 결혼한 후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시티에 거주하면서 패시픽 출판소에서 약 28년간 근무하던 그는 1972년에 은퇴하였다. 1977년에 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델핀이 사망한 후 캘리포니아주 유카이파로 이주한 바워즈는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는 1979년에 딸의 부부가 살고 있던 엘소브란테(El Sobrante)로 이사해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1987년 8월 7일 9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캘리포니아 내파 카운티에 있는 성 헬레나 묘지에 안장되었다.
[참고자료] Bowers, L. I. Secretariat Missionary File, RG 21, Record 4585, General Conference of Seventh-day Adventists Archives, Silver Spring, Maryland; Crisler, C. C. “At Our Korean Headquarters.” Review and Herald, November 25, 1926; Frost, S. L. “Chosen Union Educational Advance.” Far Eastern Division Outlook, April 1, 1928; Gjording, J. G. “A Glimpse at Headquarters.” Far Eastern Division Outlook, February 1, 1933; “Lyman Irving Bowers.” U.S. Find a Grave Index 1600-Current. Accessed June 16, 2020.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47730933/lyman-irving-bowers; Religious Publishing and Print Culture in Modern China. Edited by Philip Clart and Gregory Scott. Boston, Berlin, and Munich: Walter de Gruyter, Inc., 2015; Weaks, C. E. “Itinerating in the East Asian Union Conference.” Asiatic Division Outlook, September 1, 1917; Review and Herald, August 31, 1916;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