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커트는 1883년 5월 25일에 미국 애리조나주 피치 스프링스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나이에 재림교인이 된 그는 1907년에 모드 지넷 파커(Maude Jeanette Parker)와 결혼했다. 결혼 후 캐나다에 머물면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1911년에 목회자가 되었다. 1914년에 그는 캘리포니아합회(California Conference)에 소속되어 새크라멘도, 캘트, 윈턴 등의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다.
어커트는 1916년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아시아지회 총회에 참석하였다가 한국 선교에 대한 부름을 받고 그해 8월 말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한 어커트는 그해 1년 동안 남선 지역의 선교 본부가 있는 경산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고, 1917년 12월에는 중선 지역의 책임을 맡아 중선 지역 본부가 있던 서울로 이주하여 서울과 경기, 강원, 충청 지역의 선교를 감독하였다. 그는 1918년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1919년 3월부터 시조사 편집부의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최초의 여선교사 샤펜버그(Mimi Scharffenberg, 史嚴泰)가 입원하게 되어 그녀의 업무를 대신하게 된 것이었다.
어커트는 미국인들에게 조선을 소개하는 『조선견문기』(Glimpse of Korea)를 출간했고, 『춘양전』(The Fragrance of Spring)을 영역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고대사화』(1919), 『세계의 운명』(The Road from Eden to Eden, 1920), 『시대의 경고』(1922) 등의 서적을 번역 출간했고, 1922년 곡조가 있는 『찬미가』를 편찬하기도 했다. 재림교회 출판사인 시조사는 1920년 봄에 미국에서 미블 인쇄기(Mieble Press) 1대를 15,000엔에 구입하였는데, 어커트 편집장은 이 인쇄기를 활용하여 월간 잡지인 「시조월보」를 5천 부에서 1만 부로 확대 발생하였다.
어커트는 안식년을 맞이해 1923년에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의 업무는 테오도라 왕거린(Theodora S. Wangerin)에게로 이전되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어커트는 1925년 5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4회 총회에서 조선합회장 대리에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합회장은 오버그(Harold A. Oberg)였는데, 건강 문제로 그가 미국으로 임시 귀국하여 그를 대신하여 어커트에게 합회장 대리 직분이 맡겨진 것이었다. 합회장으로서 그는 선교 확장, 재정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며, 특별히 출판 사업을 적극 지원하였다. 어커트는 27년 6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5회 총회에서도 합회장에 재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어커트는 합회장 직을 수행하면서 한국 재림교회 출판사인 시조사 사장도 겸임했다.
그가 합회장 직을 수행하던 중 1928년 봄에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 평의원회에서 오버그 목사가 다시 조선합회장에 임명되어, 그해 9월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에 어커트는 다시 1928년 가을부터 이전에 담당했던 시조사 편집국장의 업무로 복귀했다. 그는 1930년에는 시조사 총무까지 역임하여 출판 사역에 집중했다. 이후 어커트는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932년 2월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서선대회(West Chosen Conference)의 대회장에 임명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의 선교를 담당하는 행정가로 복귀하였다. 대회장으로 사역하는 동안 그는 평안남도 용강군 선돌교회, 강서군 강대모루교회, 강서읍 정량리교회, 평원군 연교리교회, 안주군 안주교회, 평안북도 신의주교회, 황해도 중편리교회, 황해도 장연군 태탄교회, 황해도 장연군 중평리교회 등에서 전도회 등을 인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 매진하였다.
1935년 7월 4일에 조선합회장 오버그가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으로 귀국함에 따라서 어커트는 그를 대리해서 조선합회장의 사역을 수행하게 되었다. 1926년에 조선합회장 대리로 사역하다가 “허시모 사건”을 겪었던 어커트는 이번에도 합회장 대리로 사역하면서 1935년 말에 발생한 순안 의명학교의 신사참배 논쟁으로 또 한 번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해 11월에 평안남도지사 야스다케(安武直夫)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안 의명학교장 하워드 리(Howard M. Lee), 숭실학교장 매큔(G. S. McCune), 숭의여학교장 대리 정익상에게 60일 내로 신사참배 여부를 결정하도록 최후 통첩하였다. 조선합회장 대리로서 어커트는 원동지회의 자문을 얻은 후 조선합회 평의원회를 개최해 신사참배를 종교 의식이 아닌 국가 의례로 여기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최종 결의하였다. 이후 1906년 1월 17일에 어커트는 의명학교 담당자들인 하워드 리, 벤손(H. F. Benson), 정성걸 등과 함께 평안남도지사를 방문하여 신사참배 수용 결의를 통보하였다. 이 결정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많은 한국 재림교인들의 분노를 유발시켰다. 이 일로 지도력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자 대총회(General Conference)는 어커트를 필리핀 마닐라로 전근 결정을 내렸고, 어커트는 1936년 8월에 필리핀으로 떠나 20년간의 한국 선교 사역을 마무리하였다.
어커트는 필리핀 아일랜드연합회(Philippine Island Union Conference)로 옮겨 필리핀 출판사(Philippine Publishing House)에서 출판 사역을 담당하였다. 1941년에 필리핀이 일본에 점령된 후 그는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억류되었다가 1945년에 미군에 의해 구조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은퇴하여 캘리포니아주 앵그윈(Angwin)에서 생활하다가 1956년 5월 23일에 그곳에서 아내와 세 딸과 두 아들 및 몇 명의 손자와 증손자를 남기고 사맹했다. 생전에 그는 300편이 넘는 시를 출판한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참고자료] Year Book of the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26-1945; “In Remembrance-Urquhart,” Review and Herald, June 28, 1956;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 시조사100주년기념사업분과위원회. 『시조사 출판 100년』. 서울: 시조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