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리는 1880년 9월 3일 미시간주 유니언시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사우스 랭카스터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그 학교의 교사로 임명되었다. 그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 하워드 리는 캐리 스코트(Carrie Scott)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내는 1908년에 한국에 교육 선교사로 입국한 헬렌 메이 스코트(Helen May Scott)의 자매였다. 헬렌 스코트가 여학교를 운영하고 있을 때 순안 의명학교의 교장은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러셀(Riley Russell, 노설) 의사가 겸직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 재림교회의 선교 조직인 조선미션은 러셀 의사가 의료 사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국의 교육기관을 책임질 교육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세계 재림교회 본부인 대총회에 요청하였다.
헬렌 메이 스코트는 여동생의 남편인 하워드 리에게 한국 선교에 지원할 것을 적극 추천하였다. 그 초청에 응하여 하워드 리는 아내와 함께 1910년 4월 5일에 조선미션 본부가 있던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열흘 동안 머문 후 하워드 리는 순안으로 내려가서 순안 의명학교를 위한 교육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순안 의명학교에 도착한 후 그는 1년 동안 이 학교의 총무로 일하면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그후 1911년 4월에 개최된 조선미션 제2회 연회에서 하워드 리는 교육부 서기 및 의명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서 그는 가을 학기가 시작되는 1911년 8월 23일에 순안 의명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의명학교 교장에 취임한 그는 교장의 직임을 수행하면서 학생들에게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다. 1907년에 시작된 순안 의명학교의 첫 졸업식은 그가 교장으로 취임한 지 1년 6개월만인 1913년 3월에 거행되었는데, 이 때 6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그들은 모두 한국 재림교회의 사역자가 되었다.
하워드 리는 학교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서 대총회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현대식 교실과 여자 기숙사를 지었다. 이 신관 건물은 강당 및 예배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남녀 교실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이 완공된 후, 그는 그동안 따로 운영하던 남학교와 여학교를 통합하여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그는 또한 정부의 승인을 얻어 학교의 학사제도를 3년제에서 4년제로 승격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순안 의명학교를 재림교회의 교육 이념에 따라 운영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그는 재정을 확보하여 1911년 4월에 4에이커의 땅을 매입하여 농장과 과수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노동을 함으로써 학비를 벌 수 있었고, 학교는 이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판매하여 학교 운영비의 일부를 부담하였다. 하워드 리는 대총회로부터 1만 불을 추가로 지원받아 45에이커의 땅을 추가로 구입하여 농장의 규모를 더욱 늘렸다. 아울러 그는 학교 내에 실업부를 조직하여 농장 운영 및 학생들의 노동을 지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학교가 발전함에 따라 순안 의명학교의 영어식 이름은 한국산업학교(Korean Industrial School)가 되었다.
한국에서 재림교회 선교 사업이 발전함에 따라, 1917년에 조선미션은 조선대회(Chosen Conference)로 승격되었다. 조선대회 제1회 총회에서 하워드 리는 교육부와 가정선교부의 서기로 임명되었다. 이 총회의 결정으로 그는 의명학교 교장 및 교육부 서기 외에도 가정선교부 서기를 추가로 맡게 되었다. 미션에서 대회로 승격된 조선대회는 선교의 발전과 더불어 사역자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보다 전문적인 사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의명학교 내에 신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하워드 리는 신학교 설립을 주도하여 1917년에 의명학교 내에 신학교를 개설하였고, 구약의 선지서와 신약의 편지서를 강의했다.
조선대회는 승격된 지 2년 후인 1919년에 다시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로 승격되었다. 이에 조선합회는 그해 5월에 조선합회 제1회 총회를 열고 합회 임원들을 선출했다. 이 총회에서 하워드 리는 조선합회의 교육부 서기로 재임명되었고 새로 신설된 청소년부 서기로도 임명되었다. 한편, 이 총회에서는 조선합회 내에 3개의 지역 미션(서선대회, 중선미션, 남선미션)을 조직하였는데, 순안 의명학교는 서선대회(West Chosen Conference)에 소속되었다. 신설된 서선대회의 회장은 러셀 의사가 맡았고, 하워드 리는 서선대회의 서기로 임명되었다. 특별히 이 총회에서 하워드 리는 한국인 목사인 김례준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아 안수 목사가 되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는 새로운 사역을 위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20년 2월에 개최된 중선미션(Central Chosen Mission) 제1회 총회에서 그는 그 미션의 선교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에 선임되었다. 원래 중선미션 책임은 조선합회장이었던 버터필드(C. L. Butterfield) 목사가 겸직하고 있었는데, 하워드 리가 그 미션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의명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전적으로 미션의 행정자로서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가 중선미션의 책임자로 이전함에 따라 공석이 된 의명학교 교장직은 조선합회장이었던 버터필드가 임시로 그 직분을 겸직하다가 1920년 9월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한 리펠(J. E. Riffel)이 교장직에 임명되어 1923년 12월까지 의명학교를 이끌었다.
하워드 리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딸 1명, 아들 2명을 낳았지만 전염병으로 세 살 배기 딸이 세상을 떠났다. 아울러 하워드 리 자신도 1921년에 병에 걸려 신병 치료차 잠시 동안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조선합회는 버터필드 목사가 교육부 서기 및 중선미션 책임자에 겸직하도록 조처하였다. 신병차 미국에 체류하던 하워드 리는 의명학교 교장 및 조선합회 신학교의 신학부 부장으로 재선임되어 1924년 12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귀국한 그는 의명학교 교장으로서 다시 한번 학교 발전을 위해 교육 사역에 전념하였다. 그는 교장으로 돌아온 직후인 1925년 5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4회 총회에서 교육부와 청소년부 서기도 다시 맡게 되었다. 청소년부 서기로서 그는 청소년 선교회 활동을 지도했고, 1929년 봄에는 청년기도주간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는 1931년까지만 청소년부 서기 직분을 수행하였다.
한편 하워드 리는 교육부 서기 및 의명학교장의 직분만큼은 그의 한국 선교사역이 마칠 때까지 계속 유지하였다.. 교육부 서기로 사역하면서 그는 전국에 초등학교 설립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 결과 1921년에 한국 재림교회에 소속된 초등학교는 모두 17개였으며, 학생수는 657명에 이르렀다. 1924년 1월에는 각 지역 미션에 초등학교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세부 지침을 만들어 제공하였다. 그 결과 1925년 말에는 초등학교와 학생 수가 31개, 1,081명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교육 사업이 축소되어 1932년에는 초등학교가 24곳으로 줄어들었다. 하워드 리는 학교 운영을 위한 재정과 자격을 갖춘 교사들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24년 9월에 교사 양성을 위해 의명학교에 교육학과를 재설치하려고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교육부 서기로서 그는 교사의 자질을 강화하게 위해 1925년부터 장기 교원양성과정을 운영하였다. 교사 양성 과정은 매년 여름방학마다 4주에서 6주 동안 개최되었다. 이 양성 과정은 하워드 리가 대총회와 원동지회의 교육부장과 연합해서 지도하였다. 이 과정의 마지막 날에는 제3종 교원자격증 시험이 치러졌고,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는 교원 자격증이 수여되었다. 교사 양성 과정은 하워드 리가 선교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워드 리가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은 1935년 말에 발생한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던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대부분의 한국인들과 한국의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하워드 리는 1935년 11월에 평양에서 있었던 행사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이에 평안남도지사는 심사참배를 거부할 경우 학교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했다. 학교장으로서 하워드 리는 재림교회 지도자들과 많은 논의 끝에 학교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종교 의식이 아닌 국가 의식으로 수용하고 1936년 1월 17일에 신사참배를 결정을 통보했다. 이 결정은 한국 재림교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많은 교인들은 그 결정에 항의했다. 이 논란으로 인해 조선합회장이었던 어커트(E. J. Urquhart) 목사는 1936년 8월에 필리핀연합회로 전근되었다. 그리고 하워드 리도 그해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하워드 리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패시픽 유니언 칼리지(Pacific Union College)에 입학해 1938년에 신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캐나다 앨버타에 있는 캐나다 주니어 칼리지(Canadian Junior College)에서 성경 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4년 후인 1942년에 그는 모든 공적 사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 그는 캘리포니아의 로마린다에서 말년의 생애를 보냈다. 그는 엘렌 화이트의 글을 연구하여 거의 30개의 주제 모음집을 편찬했다. 그는 남동생 및 두 아들과 함께 신실한 그리스도인 생애를 지내다가 1982년 5월 21일에 캘리포니아주 로마린다에서 사망했다. 그가 미국에서 말년의 생애를 보내는 동안 그의 두 아들 제임스(James M. Lee)와 도널드(Donard S. Lee)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는데, 그 두 아들은 모두 삼육대학교의 전신인 삼육신학원과 삼육신학대학에서 학장을 역임했다. 본인과 아내, 아내의 언니(스커트), 두 아들 등 이희만 목사의 가족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선교사 가족으로서 봉사했다.
[참고자료] Butterfield, C. L. “New Building at Soonan, Korea.” Review and Herald, January 29, 1914; Butterfield, C. L. “Progress in Chosen.” Review and Herald, July 14, 1921; Daniells, A. G. “The Korean Conference.” Review and Herald, May 3, 1917; Devenney, F. H. “Camp Meeting in Chosen.” Review and Herald, October 12, 1911; Evans, I. E. “Meeting of the Chosen Union Mission.” Review and Herald, August 7, 1919; Hall, O. A. “Chosen Union Mission Biennial Meeting.” Review and Herald, October 1, 1925; Lee, Howard M. “Korea.” Review and Herald, May 26, 1910; “Lee, Howard, M.,” obituary. Review and Herald, August 26, 1982; “News Items.” Review and Herald, February 17, 1910; Seventh-day Adventist Yearbook.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12, 1918, 1920 and 1937; 「교회지남」, 1913년 5월호; 1919년 6월호; 1924년 9월호; 1935년 4월호; 1936년 10월호; 1937년 1월호;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08;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