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필드는 1879년 7월 12일 미네소타주 웰스(Wells) 근교에서 태어났다. 재림교인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미네아폴리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898년에 배틀크릭대학(Battle Creek College) 신학과에 입학해 1900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미네소타합회(Minnesota Conference)에서 문서전도사와 전도사로 일하던 중, 1902년 1월 1일에 메리 위네거(Mary Winnegar) 양과 결혼하였다. 그 후 2년 동안 미네소타합회에서 사역하면서 겨울에는 학교에서 가르쳤고, 여름에는 전도회를 이끌었다. 그후 그는 서부 오리건합회(Western Oregon conference)에서 목회 사역을 했고, 1907년에 동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이듬해에 서부 오리건합회는 재림교회 세계 본부인 대총회의 요청으로 버터필드를 한국의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버터필드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Phosa, Leslie)과 함께 1908년 9월 25일에 항해의 길을 나서서 그해 10월 중순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1908년 11월에 대총회 부회장인 에반스(I. H. Evans)가 한국에 와서 조선미션(Korean Mission)을 조직하고 버터필드를 조선 선교를 책임지는 조선미션의 감독(superintendent)으로 임명하였다. 전시열은 1909년 9월에 한국 재림교회 본부를 순안에서 서울로 옮겼고, 그해 10월 20일에 월간지 부편집장의 역할을 맡아서 「시조월보」(時兆月報)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이 잡지는 한국 재림교회 최초의 정기간행물로서, 「세천사의 기별」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시조」라는 명칭으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발행되는 한국 근현대사 문화유산의 지위를 얻은 최장수 잡지 중 하나가 되었다.
1910년 8월에 개최된 조선미션 제1회 연회에서 버터필드는 미션 감독 뿐만 아니라 중선지역(Central Chosen Field)의 책임자로도 임명되어 서울, 경기, 충청남북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지도하였다. 조선미션 감독으로서 버터필드는 1912년 7월에 현재 한국 재림교회의 본부가 위치한 회기동(당시 주소: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회기리)에 1500여 평의 부지를 구입하고 미션 본부, 인쇄소, 예배당, 선교사 사택 등을 건축한 후, 그해 겨울에 입주하여 한국 재림교회 사업을 이끌었다. 버터필드는 서선 지역(평안도, 황해도)과 중선 지역(서울, 경기, 충청도) 뿐만 아니라 동해안 지역(함경도, 강원도 일대)과 남선 지역(영남, 호남)의 선교활동 책임자들을 임명하고, 그들과 함께 한국 재림교회 선교를 지휘하였다. 그 결과 조선미션은 현저한 성장을 이루어 1917년 2월에 대총회로부터 조선미션에서 조선대회(Chosen Conference)로 승격 인가를 받았다.
버터필드는 조선대회 조직 총회에서 감독에 임명되었다. 감독으로서 그는 한국 재림교회의 자양 기반 구축을 호소하기 위해서 “조선 선교의 관찰”(Mission Survey of Korea)이라는 기사를 「리뷰 앤드 헤럴드」(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에 기고하기도 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전문적인 목회자 양성이 필요하게 되자 조선대회는 1917년 9월 1일에 순안 의명학교 내에 2년제 “신학교”를 신설하였는데, 버터필드는 신학교의 강사로도 봉사하였다.
1919년 3월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아시아 지역이 몇 개의 지회로 분리되면서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가 조직되었고, 조선대회는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조선합회 산하에 세 개의 조직, 즉 서선대회(West Chosen Conference), 중선미션(Central Chosen Mission), 남선미션(South Chosen Mission)이 분리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서 그해 5월 중순에 순안의명학교에서 개최된 제1회 조선합회 총회에서 버터필드는 조선합회의 감독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이렇게 초창기 한국 재림교회의 행정자로서 봉사하던 버터필드는 1922년 3월 25일에 부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임시 귀국하였다. 그의 막내 아들은 어린 나이에 한국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해 5월에 개최된 대총회 총회에 참석한 버터필드는 총회가 끝난 후 캐나다 서스캐처원합회(Saskatchewan Conference)의 합회장으로 임명되어 14년간의 한국 선교사 활동을 접고 미국에서 행정자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버테필드는 1926년까지 서스캐처원합회에서 합회장으로 봉사하였고, 그 후에 미국 캐롤라이나합회(Carolina Conference)의 합회장에 임명되었다. 캐롤라이나합회장의 사역을 마친 후에 버터필드는 다시 캔터키-테네시합회(Kentucky-Tennessee Conference)의 합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합회의 합회장으로 사역하던 중 건강 악화로 1935년 5월 14일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미국 남부연합회(Southern Union Conference)의 연합회장인 러스크저(S. A. Ruskjer)가 집례 했고, 캔터기-테네시합회 소속 목회자들이 조문했다. 그의 시신은 그의 아들L. A. 버터필드 장로가 거주하고 있는 미시시피주 메리디안(Meridian)의 매그놀리아 묘지에 안치되었다.
[참고문헌]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 R. I. Keate, “Elder C. L. Butterfield,” Review and Herald, July 4, 1935. Year Book of the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08-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