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트는 1882년 6월 25일에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04년에 사우스 랭커스터 아카데미(South Lancaster Academy)를 졸업하고 교사와 성경 교사로 일했다. 1908년에 워싱턴 훈련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스코트는 한국인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당시에 한국 재림교회 첫 여성 선교사였던 샤펜버그는 여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대총회에 전문적인 교육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였고, 대총회가 이 호소에 응해 교사였던 스코트를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스코트는 의료선교사인 러셀(Riley Russell, 노설)과 함께 1908년 9월 24일에 한국에 입국하여, 샤펜버그가 설립한 진남포에 있는 여학교에서 여성 교육을 담당했다. 1909년 9월에 순안에 있던 선교 본부가 서울로 옮겨지자, 샤펜버그는 교육부와 안식일학교부 서기로 임명되어 서울로 이주하였다. 이로 인해 스코트가 진남포 여학교의 책임을 맡았다. 그녀는 러셀 의사의 아내인 엘라 캠프 러셀(Ella Camp Russell)과 함께 미국 도르가협회의 도움을 받아 등록금 문제로 고통을 받는 여학생들을 지원하였다. 1910년 11월에 진남포 여학교는 순안에 있던 남학교의 인근으로 이전하였다. 1907년에 순안에서 사역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시작된 한국 재림교회 학교는 1910년에 순안 의명학교라는 이름 아래 3년제 중등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해 4월에 하워드 리(Howard M. Lee, 이희만)가 그 학교의 책임자로 일하기 위해 한국에 파송되어 1911년에 교장으로 정식 임명되었다. 하워드 리는 스코트의 여동생인 캐리 스코트(Carrie Scott)의 남편이었다. 하워드 리 교장과 그의 아내는 2년 전에 한국에 들어온 스캇의 영향으로 한국 선교사로 자원했다. 하워드 리는 교장으로 취임한 후 교육시설과 환경을 개선하고 남학생뿐만 아니라 여학생을 받아들여 남녀공학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따라서 여학교의 책임자였던 스코트는 순안 의명학교의 교사가 되어 성경과 산수 등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그녀는 순안 안식일교회에서 “재림청년회”(Adventist Youth Club)를 조직하고 한국에서 청년선교회 활동을 시작했다. 1912년 대총회 연감(Yearbook)에 따르면, 스코트는 순안 의명학교의 교감에 임명되었다. 그녀는 순안 의명학교 교감 및 교사로 근무하면서 기숙사에 사는 여학생들을 돌보는 사감으로서도 일했다. 1915년 4월에 조선미션(Korea Mission) 제5회 총회가 순안교회에서 개최되었고, 5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아시아지회(Asian Division Conference) 제1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는 한국 측 대표 12명이 참석했는데, 순안 의명학교의 여교사인 스코트도 그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아시아지회 총회는 2년마다 열렸기 때문에 1917년에도 제2회 총회가 같은 장소에서 개최되었고, 그녀는 이 총회에도 순안 의명학교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스코트는 선교사로서 대부분의 기간을 의명학교의 교사로 봉사하였다. 특히 그녀는 여성 사역자들을 양성하는 데 사역의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그녀는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고, 여학생들을 교사로 양성하였다. 여성 사역자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도 1919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여성들을 위한 모임에서 스코트는 주로 성경을 가르쳤다. 여성 전도자 양성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자, 그녀는 1927년부터 순안 의명학교 내에 설립된 신학교에서 여성을 위한 신학 과정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여성 신학 과정의 주임교수로 임명되었다. 1931년에 신학교가 서울로 이전한 후, 여성을 위한 신학 과정도 서울로 이전했다.
그리고 1933년부터는 신학교가 통신과목으로 운영되자 여성을 위한 강좌도 통신과정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36년부터는 여성을 위한 신학 과정이 여성 전도자 양성과정으로 개편되었고, 스코트는 그 과정의 주임 교사로 임명되어 여성 전도자를 양성하였다.
스코트가 여성 전도자 양성 과정에서 가르칠 때, 순안에 있던 의명학교에서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였다. 1936년 1월 18일에 매일신보는 재림교회가 운영하는 의명학교가 신사참배를 수용했다고 발표했다. 이 기사에는 조선합회장이었던 어커트(E. J. Urquhart)와 그 외의 지도자들의 사진도 함께 실렸다. 스코트는 의명학교와 재림교회를 위해 이 기사가 게재된 신문들을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사진과 기사를 제거하였다. 그 사건은 미국인이었던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녀의 선교활동은 1940년대까지 약 32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서 일제의 종교 억압 정책이 강화되었다. 일본은 1940년에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대총회는 1940년 11월부터 한국에서 선교사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고, 스코트는 그때1월 16일에 미국으로 철수하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1941년 5월에 개최된 대총회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선교사로서의 마지막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 후 독신으로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1963년 1월 8일 주님의 품에 잠들었다.
[참고문헌] 「교회지남」, 1918년 2월호; 1919년 4월호; 1927년 7월호; 1930년 8월호; 1934년 6월호; 1936년 7월호; 1941년 2월호; 김재신. 『삼육대학교 90년사』. 서울: 삼육대학교출판부, 1998.;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이국헌. 『삼육대학교100년사』. 서울: 삼육대학교출판부, 2008.; Review and Herald. May 14, 1908; January 7, 1909; August 24, 1911; January 29, 1914; April 4, 1918; March 7, 1963; Yearbook of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1908.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08,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