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은 1875년 7월 21일 일리노이주 스트라스버그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배틀크릭대학(Battel Creek College)에서 간호학과를 졸업한 후, 조지워싱턴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의대생으로서 그는 이슬람 국가 등의 선교지에서 의료선교사로 일할 비전을 세웠다. 그가 인턴 과정을 마칠 무렵,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의 딸 윌레나(Willena)가 두 살도 되기 전에 말라리아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딸의 죽음을 목격한 스미스 목사는 한국인들을 위한 의료선교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재림교회 세계선교 본부인 대총회에 의료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스미스 목사의 요청을 받은 대총회 해외선교부는 한국 선교를 위해 자원할 의료선교사를 찾고 있다는 광고를 냈다. 바로 그 시기에 러셀은 인턴을 마치고 해외 선교에 자원했다. 이에 대총회 해외선교부는 러셀에게 인도의 카슈미르와 극동 지역의 한국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제시했다. 러셀은 카슈미르보다 덜 알려진 한국을 선택하여 최초의 한국 재림교회 의료선교사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 선교를 자원한 후 러셀은 1908년 7월 22일에 엘라 마가렛 캠프(Ella Margaret Camp)와 결혼했다. 그녀는 1876년 10월 22일 오리건주 마쉬필드 근처에서 태어났다. 재림교인이 된 후 그녀는 한 학교에서 1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고, 세인트 헬레나 요양원(St. Helena Sanitarium)에서 간호사로 훈련을 받았다. 그 후 그녀는 배틀크릭에 있는 의료선교대학(Medical Missionary College)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간호사 과정을 이수했다. 1908년에 그녀는 배틀크릭교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러셀 의사와 결혼했다.
새 가정을 이룬 러셀 부부는 1908년 8월 1일 시애틀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그들은 1908년 9월 24일에 교육선교사로 자원한 스캇(Helen May Scott)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당시 한국 재림교회 선교본부가 있던 순안에 도착한 러셀은 초대 선교사인 윌리엄 스미스 목사의 집에서 의사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던 환자 8명을 치료했다. 이후 한 달 정도 스미스의 집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인근 지역을 찾아 의료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8년 9월 한 달 동안 약 500명의 환자를 그런 방식으로 돌보았다. 그러나 진료소 없이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거는 1년 전에 스미스 목사가 설립한 순안 사역자양성소의 교실 한 칸을 개조하여 진료실로 사용했다. 하지만 그 진료실은 너무 작아서 밀려오는 환자들을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진료소 건물을 마련해야만 했다. 1909년 9월에 조선미션(Korean Mission) 본부가 순안에서 서울로 옮기게 되었고, 월간지 편집장에 임명된 샤펜버그가 서울로 이주하면서 순안에서 거주하던 집을 정리했다. 러셀은 이 집을 구입해서 진료소로 사용했다. 그는 이 작은 가정 진료소에서 4년 동안 2만여 명의 환자들을 치료했으며, 미국 잡지인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는 “20달러짜리 건물에서 2만 명의 환자를”이라는 제목으로 이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이 기간동안 순안진료소에서 러셀과 함께 일한 사람은 간호사 1명, 직원 2명 등이었다.
의료선교사로서 환자들 치료에 전념하던 러셀은 1908년 11월에 조선미션이 조직될 때 의료부 서기를 맡았다. 그후 의명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으로 봉사하던 스미스 목사가 대총회 참석차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1909년 초에는 의명학교 교장을 겸직하였다. 1909년 9월에 선교본부를 서울로 옮긴 후, 조선미션 지도자들은 전국을 네 개의 선교 지역(서선, 중선, 남선, 동해안)으로 나누고, 러셀을 서선(West Chosen) 지역의 선교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에 러셀은 순안진료소에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조선미션 의료선교부 서기, 의명학교장, 서선 지역 선교 책임자 등으로도 봉사하였다. 이 직책 중 의명학교장의 자리는 1911년 이후부터는 교육선교사로 내한한 하워드 리(Howard M. Lee, 이희만)에게 넘겨졌다. 러셀은 의사로서 순안진료소에서 환자들을 돌보면서 서선지역의 교회들과 선교지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따라서 진료소의 업무는 러셀 부인 및 한국인 조력자들에 의해서 수행되기도 했다.
러셀은 1910년 8월 13일에 개최된 조선미션 제1회 총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러셀이 의료선교와 전도활동에 힘쓰던 1915년에 첫째 아들 베넷(Bennet)이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러셀 부부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면서 순안진료소의 시설 및 장비를 개선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러셀은 1913년에 대총회로부터 2천 달러를 제공받아 병원을 건축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부로부터 병원 인증을 받을 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다. 러셀 의사는 대총회에 병원 인증을 받을 수 있는 규모의 건물을 지어야 할 필요성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대총회는 순안병원의 확장을 위해 7천 달러를 추가로 지원했다. 러셀은 이 자금을 가지고 기존 건물을 확장해 2층짜리 벽돌 건물을 지어 시설을 갖춘 후 순안병원 인가를 받았다.
1917년에 러셀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기미독립만세운동 발발 직전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1919년 3월 1일에 독립운동이 발생하였고, 3월 7일에는 순안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여러 시민들이 총상을 당했고, 러셀 의사는 순안병원에서 그들을 치료해 주었다. 이 일로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 동안 고통을 겪은 후 평양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이 적십자 소속임을 밝히고 시위 과정에서 총상을 입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은 의사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항변했다. 판사는 러셀에게 미국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물었고, 러셀은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환자들을 치료했고, 미국 대통령인 워렌 하딩(Warren G. Harding)도 자신이 치료한 환자 중 한 명이라고 말하면서 하딩의 편지를 증거로 제출했다. 그 편지를 본 판사는 레설의 모든 혐의를 기각하는 결정을 내렸다.
1920년 여름에 대총회는 1만 달러를 보내주었고, 러셀은 그 자금으로 순안병원의 난방시스템을 서양식으로 바꾸고 병원의 규모를 확장시켰다. 이렇게 한국에 와서 의료 사업과 선교 사업에 전념하던 러셀은 1922년 봄에 아내와 아들의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한국 선교를 중단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 재림교회 최초의 의료선교사로서 14년간 사역하는 동안 러셀은 24개 이상의 교회를 개척하고, 842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캘리포니아의 글렌데일 요양병원에서 의사와 인턴들을 위한 교수로 일하였다. 그리고 그는 1926년부터 남부 캘리포니아합회(Southern California Conference)의 행정위원으로도 봉사했다. 이듬해 러셀은 그 합회에서 명예 목사로 임명되었다. 의사와 목사로서의 그의 사역에서 은퇴한 후, 러셀은 캘리포니아 글랜데일 요양병원의 이사로도 봉사했다.
1940년 11월, 그가 그 병원의 이사로 임명되기 전, 그의 부인이었던 엘라 캠프 러셀의 사망 기사가 「패시픽 유니온 리코더」(Pacific Union Recorder)에 실렸다. 4년 후인 1944년에 러셀은 테레사 카터 예일(Theresa Carter Yale)과 재혼했고, 1954년 은퇴한 후에도 그녀와 함께 여생을 보내다가 1961년 1월 27일에 글렌데일에서 주님 품에 잠들었다.
[참고자료] Pacific Union Recorder, Nov 27, 1940; March 20, 1961; Review and Herald. March 5, 1908; July 1, 1909; April 21, 1910; November 24, 1910; May 16, 1912; August 5, 1912; May 3, 1917; October 14, 1920; June 1, 1961; Year Book of the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The Official Directorie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09, 1910, 1923, 1927, 1928, 1931, 1943; 「교회지남」, February 1912; February 1922; July 1924; November 1954;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