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910

초창기

샤펜버그, 미미

Mimi Scharffenberg
1907. 01. 13-1919. 01
1883. 11. 07-1919. 12. 19
미국, 성경교사, 출판인
사엄태(史嚴泰)
샤펜버그는 1883년 11월 7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8명의 자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루터교 신자였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루터교회에 다녔다. 14세 때에 루터교 목사의 설교를 듣고 희심을 경험했으며, 그때부터 해외 선교사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녀가 재림교회에 입교한 것은 18살 되던 때였다. 1901년에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재림교회 전도회에 참석한 후 침례를 받고 밀워키 재림교회 신자가 되었다. 그해 가을에 샤펜버그는 배틀크릭대학(Battle Creek College)에 입학했다. 한 학기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도활동을 시작했으며 위스콘신에서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성경 교사로 고용되었다.

  샤펜버그가 한국 선교사로 활동하게 된 배경에 대한 놀라운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어느 날, 그녀는 선교활동을 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그녀는 큰 강 건너편에서 흰옷을 입은 여인들이 열심히 손을 흔들며 그녀를 초청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그녀는 재림교회 세계 본부인 대총회(General Conference)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그녀를 한국 선교사로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던 그녀는 지도를 펼쳐 한국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훑어보던 중, 그녀는 한 책에서 그녀가 꿈에서 본 여인들과 닮은 사람들이 있는 사진 한 장을 보았다. 그 사진을 확인한 후 그녀는 그 꿈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고 한국 선교사로의 초청에 응하기로 결심했다. 한국 선교를 자원한 샤펜버그는 1906년 11월 26일에 위스콘신 주 밀워키를 떠나 밴쿠버로 향했고, 1906년 12월 5일에 한국을 포함해 극동 아시아 지역 방문을 나선 대총회 지도자 프레스코트(W. W. Prescott)와 함께 벤쿠버 항구를 떠나 25일간의 항해 후 1907년 1월 1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때 일본에서는 일본미션(Japan Mission) 제1회 연회가 개최되었다. 그녀는 한국 재림교회 대표로 그 연례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그곳에서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스미스(William R. Wmith, 사미서)와 그의 부인을 만났다. 샤펜버그는 그 연회를 마친 후 일행과 함께 한국으로 출발해 1월 13일에 한국의 선교본부가 있던 순안에 도착했다.

  샤펜버그가 한국에서 첫 번째로 추진한 일은 사역자양성학교를 설립하려는 스미스 목사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면서 그 일을 위한 자금 조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우선 한국에 올 때 오르간을 구입하기 위해 가져온 돈 73원을 학교 설립 기금으로 바쳤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123엔의 헌금을 확보했다. 샤펜버그와 스미스 목사는 대총회에서 제공해 준 100달러의 자금을 추가해서 순안에 사역자양성학교를 지었다. 그 사역자양성학교는 1907년 12월 9일에 개교했으며, 나중에 순안의명학교로 명명되었다. 당시에 순안 사역자양성학교는 초등교육 4년, 중등교육 3년 과정으로 운영되었다. 초등과정에는 주로 여학생이, 중등 과정에는 남학생이 공부했다. 남학생을 위한 남학교는 스미스가 지도하였고, 여학교는 샤펜버그가 이끌었다.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한 건물에서 남녀학교를 운영하기가 어렵게 되자, 샤펜버그는 여학생들만을 위한 여학교를 진남포 신흥동교회, 순안군 군상리 민가 등으로 옮기면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여성 계몽가로서 샤펜버그는 기초적인 수업 이외에도 뜨개질과 같은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쳤고, 밀워키 교회에서 기증한 오르간으로 음악도 가르쳤다. 특히 그녀는 영어로 된 복음성가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배포하였다. 그녀가 여성들을 위해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교육은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여성들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단정하게 옷을 입는 습관을 가지도록 교육하였다. 이런 교육을 바탕으로 그녀는 한국 여성들을 계몽하고 기독교인으로 양성하였다. 샤펜버그는 여학교를 이끌면서 더 전문적인 여성 교육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녀는 이러한 필요성에 대해 미국 재림교회 공식 기관지인 「리뷰 앤 헤럴드」(Review and Herald)에 기고했다. 이런 호소로 인해 여성 교육선교사인 스캇(Helen May Schott, 스캇)이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1908년 11월에 조선미션(Korean Mission)이 조직되었고, 샤펜버그는 미션 본부의 안식일학교부서의 서기로 임명되었다. 아울러 출판부와 월간지 편집의 책임도 맡게 되었다. 그녀는 한국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출판 업무에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미션의 출판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와 함께 일본에서 출판 기술을 익히고 돌아온 김승원, 김규혁과 함께 안식일학교 교재 출간 등 출판 사업을 이끌었다.

  1909년 9월에 조선미션의 본부가 순안에서 서울로 이전되었고, 샤펜버그도 본부에서의 사역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그녀가 맡고 있던 여학교 책임은 교육선교사로 내한한 스캇이 맡게 되었다. 1910년 8월에 개최된 조선미션 제1회 연회에서 샤펜버그는 안식일학교부 서기, 교육부 서기 이외에도 월간지 편집장으로 정식 임명되었다. 이 결의에 따라 그녀는 1910년 9월부터 월간지 「말세복음보」를 발간했다. 이 잡지는 한국 재림교회 역사에서 최초의 월간지였다. 이 월간지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잡지명을 「세천사의 기별」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1910년 10월 20일에 「세천사의 기별」 제1호가 발행되었는데, 이 잡지는 한국 근대 잡지사에서 최장수 잡지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린 「시조」의 전신이다.

  1911년에 개최된 조선미션 제2회 연회에서 의명학교 교장으로 내한한 하워드 리(Howard M. Lee, 이희만)이 교육부 서기를 맡게 되어, 샤펜버그는 안식일학교부 서기 및 월간지 편집장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조선미션은 1912년에 회기동에 선교 본부와 인쇄소와 예배당을 건립하고 사무실을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그곳에는 선교사 사택들도 건축되었는데, 샤펜버그는 그 사택 중 하나로 이주했다. 그녀는 월간지 편집장으로서 사무실과 인쇄소가 있는 본부 건물에서 일했다. 1913년에 그녀는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으로 임시 귀국해 대총회 총회에 참석하였는데, 그 때 월간지 편집은 오버그(Harold A. Oberg, 오벽) 목사가 대신했다.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한 샤펜버그는 1915년 4월에 개최된 조선미션 제5회 연회에서 안식일학교부 서기와 교육부 서기에 재임명되었다. 월간지 편집장은 오버그 목사가 계속 맡았다. 이 연회 이후에 샤펜버그는 재림교회 청년들을 위한 아침기도력을 출간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1908년에 발행한 성인 기도력에 이어 청년 기도력을 발간했다. 이듬해인 1916년에 그녀는 다시 월간지 편집장을 맡아 출판 사역을 이어갔다. 그녀의 지도 아래 월간 소식지인 「교회지남」(1916)이 창간되었고, 기존에 출간하던 「세천사의 기별」은 「시조월보」로 명칭을 바꾸어 선교 잡지로 재편했다. 첫 여성 선교사로서 샤펜버그는 안식일학교부 서기, 교육부 서기, 월간지 편집장 등의 사역에 전념하다가 1917년부터는 여러 선교사들이 내한함에 따라 월간지 편집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1917년 2월에 개최된 조선대회(Chosen Chonerence) 승격 총회에서 샤펜버그는 기존에 맡았던 부서의 서기에는 더 이상 임명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건강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샤펜버그는 대총회장 대니얼스가 저술한 『세계적 대쟁투: 동방 문제와 아마겟돈』(The World War: Its Relation to the Eastern Question and Armageddon), 엘렌 화이트의 『부조와 선지자』(Patriarchs and Prophets)를 번역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그녀는 1919년 1월에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 DC에 있는 재림교회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상태는 더 나빠져 1919년 12월 19일에 주님 품에 잠들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019년 11월에 삼육대학교는 삼육대학교의 전신인 사역자양성학교 설립자 중 한 사람이자 여성 교육의 선구자였던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캠퍼스 내에 기념비를 세웠다.

[참고자료] Asiastic Division Outlook, Mar 1-15, 1920;  Review and Herald. March 19, 1908; May 14, 1908; July 14, 1909; August 4, 1910; May 30, 1911; April 17, 1913; May 3, 1917; January 22, 1920; Yearbook of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The Official Directorie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11;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