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는 1876년 3월 11일에 캔자스주 하워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878년 7월에 아이다호주 보이즈로 이주해 정착했다. 그는 1894년 가을에 왈라왈라대학(Walla Walla College)에 입학해서 질병 등으로 학업이 연기되어 1901년에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상부컬럼비아합회(Upper Columbia Conference)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에 그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넬슨에서 영(W. C. Young)과 함께 장막 집회를 이끌었고, 그곳에서 애디 카나한(Addie Canahan)이라는 이름의 간호사를 만나 1903년 12월 30일에 결혼했다. 스미스는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오리건주 베이커에 있는 재림교회 목사로 사역했고 1905년 2월 21일에 안수를 받았다.
스미스는 1905년 8월에 대총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1905년 9월 18일에 아내와 9개월 된 딸 윌레나(Willena)를 데리고 배틀 타고 벤쿠버항을 떠났다. 출항한 지 18일 만인 10월 7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스미스 목사는 일본미션(Japan Mission)의 감독이었던 필드(F. W. Filed) 목사의 집에 머물면서 열흘 동안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 후 그는 필드 목사와 함께 일본을 떠나 10월 20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도착한 스미스 목사는 초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의 도움으로 서울에 집을 얻은 후 일본으로 건너가 아내와 딸과 함께 11월 17일에 서울로 돌아와 공식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약 두 달 동안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선교활동을 모색하던 스미스는 1906년 2월 7일에 한국어 선생을 대동하고 북서쪽에 형성된 재림교인들을 만나기 위해 진남포로 갔다. 진남포에서 교인들을 만나 열흘간 체류하고 서울로 돌아온 스미스 목사는 한국 재림교회 선교본부를 서울에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에 서울에는 재림교인이 없었고 진남포 주변에만 4곳에 교회가 있었다. 이에 스미스는 진남포에 정착하기로 하고 1906년 5월 말에 가족들을 데리고 진남포로 이사했다.
진남포에 정착한 직후, 스미스는 사역자를 양성할 학교를 설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스미스 목사는 1906년 6월 초에 평안남도 순안읍에 순안교회를 세은 후 그곳으로 이주하여 한국 선교의 본부를 삼았다. 순안에 정착한 직후에 어린 딸 윌레나가 말라리아에 걸려 1906년 11월 14일에 사망했다. 어린 딸의 죽음을 겪은 스미스는 한국에 의료사업이 필요함을 깨닫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다. 선교본부를 순안으로 옮긴 직후 스미스 목사는 우선 학교 건립을 추진했다. 그는 순안교회 교인으로 그 지역의 유지였던 김두형을 앞세워 평안남도지사로부터 순안 석박산 기슭의 땅 45에이커를 교육 부지로 제공받았다. 스미스 목사는 1907년 9월 12일에 사역자 양성을 위한 학교 건립 승인을 받은 후, 1907년 1월에 내한한 첫 여성선교사 샤펜버그(Mimi Scharffenberg, 사엄태)와 함께 자금을 모으고, 재림교회 세계 본부인 대총회(General Conference)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서 7칸짜리 기와 한옥을 건축하여 12월 9일에 학교를 개교하였다.
학교 건축이 한창이던 11월에 첫째 아들 제스로 워렌(Jethro Warren)이 태어났는데, 그 어린 아들 역시 이질에 걸려 1912년에 원산에서 사망했다. 스미스 목사는 어린 두 자녀를 질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스미스 목사에 의해서 한국 재림교회 선교가 확장되자 대총회는 여러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1908년 11월에 대총회 회계인 에반스(I. H. Evans) 목사가 한국을방문해 조선미션(Korean Mission)을 일본미션으로부터 독립시켰다. 그 조직 총회에서 조선미션의 책임자는 버터필드(C;. L. Butterfield, 전시열) 목사가 맡았고, 스미스 목사는 서기 겸 회계에 임명되었다. 스미스 목사의 부인은 안식일학교부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회의에서는 월간 선교지 출간도 결의했는데, 스미스 목사가 편집장에 추가로 임명되었다.
스미스는 1909년 5월에 휴가 겸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대총회 총회에 참석차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해 9월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원산에 주재하면서 동해안 지역 선교에 집중했다. 1910년 2월에 조선미션의 지도자들은 전국을 네 개의 지역(중부, 서부, 남부, 동해안)으로 나누고 각각 서울과 순안과 경산과 원산에 선교 본부를 세웠다. 이 결정에 따라 스미스 목사는 원산에서 동해안 선교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한국인 사역자 김효섭과 함께 원산에 주재하면서 동해안 지역 선교에 집중했는데 이 선교부는 함경북도에서부터 동해까지 관할하였다. 1910년에 원산에서의 첫 목회에서 스미스 목사는 21살의 최태현을 개종시켜 한국인 지도자로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최태현 외에 15 명의 청년들을 교육시켜 원산에 안식일학교를 조직했다. 1911년에는 신도 30명을 모아 교회 건물을 매입하고 원산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16일에는 부인 및 유창선 여선교인과 함께 원명초등학교를 개교하고 교육사업을 또 시작했다. 이후 스미스 목사는 원산에 와우동교회, 함경남도 이원교회 등을 세우면서 동해안 선교를 추진하였다. 원산에서 사역하는 기간동안에 스미스 목사는 간도 지방을 세 번 방문했다. 이렇게 스미스는 원산을 중심으로 함흥과 간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스미스가 원산에서 선교에 전념하고 있을 때, 왕거린 목사가 경산에서 남선지역을 위해 선교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결핵 진단을 받고 1916년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조선대회(Chosen Conference)는 스미스를 남선지방 선교 책임자로 임명했다. 남선지역 선교 책임자로서 스미스는 제주도와 울릉도 선교에 참여했다.
1919년 3월에 조선대회는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로 승격되었고, 그 조직 총회에서 스미스 목사는 자신이 설립한 순안 의명학교 내에 있던 신학교의 성경교사 및 실업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신학생들에게 성경과 역사를 가르쳤고, 실업부를 확장하기 위해서 농장을 더 많이 구입했다. 스미스가 몸담고 있던 신학교는 1922년에 문을 닫고 대신 통신과정으로 전환되었다. 조선합회는 스미스 목사를 통신학교 교장에 임명하여 신학생들을 배출하는 사역을 계속해서 추진하게 했다.
1923년 6월 조선합회 제3회 총회가 순안에서 개최되었고, 그 총회 후에 서선대회(West Chosen Conference) 총회가 별도로 개최되었는데, 이 총회에서 스미스 목사가 서선대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행정자로서 서선대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역하였다. 그러나 건강 악화로 그 직책을 계속 수행할 수 없었다.
1925년 2월 11일에 스미스 목사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20년간의 한국 사역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미국으로 영구 귀국한 스미스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마린다에서 거주하면서 한국 재림교회 역사를 정리하고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그렇게 말년의 삶을 보내다가 1967년 12월 10일에 90세의 나이로 로마린다에서 사망했다.
삼육대학교는 삼육대학교의 전신인 의명학교를 설립하고 한국 재림교회 교육사업과 선교사업에 헌신한 그의 삶을 기리기 위해 2014년 5월 10일 캠퍼스 안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2016년에는 삼육대학교의 교양대학을 스미스 학부대학(교양대학)으로 명명했다.
[참고자료] Review and Herald. June 21, 1906; October 24, 1907; January 14, 1909; April 21, 1910; November 24, 1910; September 18, 1919; Yearbook of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05; 「교회지남」, February 1922;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유영순. 『회고담』. 서울: 시조사, 1984;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