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그는 1884년 6월 20일에 미국 오리건주 아스토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왈라왈라대학(Walla Walla College)에 재학하던 중 조선미션(Korea Mission)의 선교 요청을 받고 1909년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오버그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09년 11월 중순이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 재림교회 선교본부인 조선미션의 서기 및 회계를 맡았다. 원래 그 자리는 한국에 초대 선교사로 온 스미스가 맡았었다. 스미스는 1909년 5월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대총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그해 10월에 다시 귀국해 원산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가 맡았던 직책이 오버그에게 위임되었다.
1910년 2월에 한국 재림교회는 한국 전역을 4개의 선교 지역(중선, 서선, 남선, 동해안)으로 나누고 각 지역별로 선교 본부(서울, 순안, 경산, 원산)와 책임자들을 선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오버그는 서울에 본부가 있는 중선 지역의 선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해 8월에 개최된 제1회 연회에서 조선미션은 중선 지역을 서울과 중선(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으로 분리되었고, 오버그는 서울 지역의 선교 책임을 맡았다. 이 결정으로 그는 조선미션의 서기 및 회계 뿐만 아니라 서울 지역 선교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1911년에 개최된 조선미션 제2회 연회에서 김병룡, 김석영, 헬레나 등이 서울 지역의 사역을 위한 선교인으로 배치되어, 오버그는 이들과 함께 서울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전개하였다.
1912년에 오버그는 엘시 그레이엄(Elsie Graham)과 결혼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사역을 지속했다. 1915년에 이르러, 그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해 4월에 오웬(Brownie R. Owen)이 조선미션의 서기 겸 회계에 임명되었고, 오버그는 월간지 편집장 및 출판부 서기에 선임되었다. 아울러 1915년 5월 1일부터 14일까지 중국 상해에서 제1회 아시아지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총회에서 오버그는 왕거린(R. C. Wangerin)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7년 2월에 조선미션은 조선대회(Chosen Conference)로 승격되었다. 그 당시에 한국을 방문한 세계 대총회장 대니얼스(A. G. Daniells)는 한국교회가 세계 재림교회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 한국 재림교회의 조직 총회를 인도하였다. 이 총회에서 오버그는 조선대회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이 외에도 그는 출판협회 서기도 겸직하였고, 그의 아내(Ms. Oberg)는 안식일학교부 서기로 임명되었다. 한편 그해 9월에 순안 의명학교 내에 2년제 신학교가 개설되었는데, 오버그는 강사 중 하나로 임명되어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역할도 아울러 수행하였다.
1919년에 이르러 조선대회는 한 단계 더 성장하여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로 격상되었다. 조선합회는 그해 5월에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조선합회 내에 서선대회(West Chosen Conference), 중선미션(Centeral Chosen Mission), 남선미션(South Chosen Mission) 등 세 개의 대회 및 미션을 조직하였다. 그 후 조선합회는 각 대회 및 미션을 이끌 책임자들을 선출했는데, 오버그는 남선미션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남선미션은 전라도와 경상도와 충청도의 일부 지역을 담당하는 선교 조직이었고, 본부는 경상북도 경산에 있었다. 남선미션의 책임자로서 오버그 목사는 바우어스(L. I. Bowers), 김연묵, 최태현, 정문국 등의 사역자들과 함께 그 지역의 선교활동을 이끌었다.
1921년 6월에 제2회 조선합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총회에서 지역 미션의 지도자들이 교체되었다. 특별히 남선미션의 책임자였던 오버그는 서선대회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2년에 조선합회 감독이었던 버터필드 목사가 미국의 서스캐처원합회(Saskatchewan Conference)의 합회장에 임명 됨에 따라서 조선합회 감독의 자리는 오버그 목사가 맡게 되었다. 1923년 6월에 순안에서 조선합회 제3회 총회가 열렸는데, 이 총회에서 오버그는 조선합회 감독으로 정식 임명되었고, 그의 아내 오버그 부인은 조선합회 서기 겸 회계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925년에 오버그 부인의 건강이 악화되어 오버그 목사는 가족들을 데리고 신병 관리 차 미국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그가 맡았던 조선합회 감독의 직책은 1916년에 선교사로 내한한 어커트(E. J. Urquhartm) 목사가 대리하게 되었고, 1917년에 내한한 바우어스 목사가 서기 겸 회계로 임명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오버그는 서부워싱턴합회(Western Washington Conference)에서 목사로 일하다가 1928년 봄에 다시 조선합회 감독으로 재임명되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감독의 직책을 수행하던 중에 한국 재림교회에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다. 1930년 1월 24일에 한국 재림교회 출판사인 시조사에 화재가 발생하여 출판사 건물 및 합회 본부 건물 두 채가 전소되었다. 오버그 감독은 실의에 빠진 한국 재림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해 2월 20일에 원동지회장이 방한해 전소된 출판사 건물과 합회 본부 건물의 재건축 문제를 논의했다. 그리고 그해 4월에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원동지회 행정위원회에 참석한 오버그 감독은 건물 복구를 위한 세계교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이런 노력으로 자금을 확보한 그는 출판사와 본부 건물의 신축을 추진하여 1930년 12월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한국 재림교회는 위기를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 좋은 건물 여러 채(합회 본부, 출판사, 본부교회 등)를 건축하게 되었다.
1930년대 들어서 세계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한국 재림교회의 재정 상황이 매우 나빠졌다. 이에 오버그 감독은 1931년부터 1933년까지 교회의 예산을 삭감하고 목회자의 월급을 삭감하는 등 재정 긴축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총회로부터 긴급 원조를 받아서 예산을 운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울에서 대규모 전도회를 개최하는 등 선교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33년에는 지역 조직인 미션을 세 개에서 다섯 개(서선, 중선, 북선, 영남, 호남)로 재편성하였다. 1935년 5월에 조선합회 제9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오버그 감독은 대총회의 모델에 따라서 총회 전에 목회자 연수회를 개최하였다. 아울러 총회가 진행 중이던 5월 11일에는 한국 선교 3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감독으로서 오버그는 그 기념식을 주재하였다. 총회가 마친 뒤, 그해 7월 4일에 오버그는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에 그를 대신해 서선대회장이었던 어커트 목사가 조선합회 감독직을 대행했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 재림교회는 순안 의명학교의 신사참배 논란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으로 어커트 목사 등 한국 재림교회 선교사들은 큰 곤궁에 처했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던 오버그 목사는 1936년 5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총회 총회에 참석했다. 대총회 총회가 마친 후 조선합회 감독을 대행했던 어커트 목사는 필리핀합회로 전임되었다. 이에 오버그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조선합회 감독직을 다시 수행하였다. 그는 1937년 4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10회 총회에서도 감독에 재임명되었다. 1937년에 한국 재림교회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교회의 재정적 위기는 지속되었다. 또한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청일전쟁을 모의하는 등 국제 정세도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기간 동안 조선합회의 감독으로 활동한 오버그는 교회 위기 극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9년 1월에 개최된 원동지회 총회에서 오버그는 일본대회(Japan Conference)의 서기 겸 회계로 임명되었다. 위기에 빠진 한국 교회를 이끌던 오버그는 일본으로 떠났고, 그를 대신해 왓츠(R. S. Watts)가 조선합회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오버그는 일본에서 사역하던 중 태평양전쟁의 위기로 인해 1941년 초에 미국으로 돌아와 오리건주 동부의 벤드 구역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 후에 포틀랜드로 전근하여 포틀랜드 요양병원의 원목으로 사역하다가 1948년 6월 30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두 아들과 딸 및 세 명의 손주들이 있었다. 한편, 그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첫째 딸이었던 자넷 오버그(Jeanette Oberg)가 순안에서 태어나 성장하다가 질병으로 죽어 양화진 묘지에 안장됐다.
[참고자료] “Obituaries-Oberg,” Review and Herald, Aug. 26, 1948; Butterfield, C. L. “Training in New Recruits.” Review and Herald. April 21, 1910; Butterfield, C. L. “First Magazine Campaign in Korea.” Review and Herald. May 30, 1911; Daniells, A. G. “The Korean Conference.” Review and Herald. May 3, 1917; Evans, I. H. “Our Work in Korea.” Review and Herald. January 14, 1909; Evans, I. H. “Our Work in Korea.” Review and Herald. November 24, 1910; Hall, O. A. “Chosen Union Biennial Meeting.” Review and Herald. October 1, 1925; Oberg, H. A. “Evangelistic Advance in Chosen.” Review and Herald. January 28, 1932; Yearbook of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16; 양화진문화원.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서울: 홍상사, 2015;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유영순. “초기 선교사들의 사역과 일화.” 「교회지남」, 1970년 3월호;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