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910

초창기

왕대아, 테오도라 샤펜버그

Theodora Scharffenberg Wangerin
1909. 10. 08-1940. 12. 10 / 1947. 06. 26-1952. 06
1888. 12. 17-1978. 03. 19
미국, 선교인, 출판인
왕대아(王大雅)
테오도라 왕거린은 1888년 12월 17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1900년에 재림신앙을 받아들인 부모의 신앙을 따라 12살 때부터 재림교회에서 성장하였다. 그녀의 언니 미미 샤펜버그는 1907년에 한국에 입국한 한국 재림교회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다. 테오도라는 언니의 영향으로 한국에 대한 많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위스콘신합회에서 여전도인으로 근무하던 중 1909년 5월에 왕거린(Rufus C. Wangerin, 왕아시)과 결혼한 후 남편과 함께 선교를 위해 내한했다.

  1909년 10월 8일에 조선미션(Korean Mission) 본부가 있는 서울에 도착한 후 왕거린 부부는 남선 지역의 선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11년 8월 29일에 경산으로 이주한 왕거린 부부는 한국인 사역자들과 함께 사역을 전개해 1912년에 경산교회를 조직하였고, 그 후 대구, 동래, 부산 등 경상도 지역에 한국 사역자를 파견하였다. 1914년에는 충정도 강경과 진천, 전라도 김제와 나주로 사역자를 보냄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재림교회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1914년에 남편 왕거린 목사가 결핵에 걸려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1916년에는 막내딸이 질병으로 사망했고,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테오도라 왕거린은 1916년 7월에 남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남편의 치료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왕거린 목사는 1917년 6월 1일 아침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

  남편이 죽은 지 6개월 후인 1917년 12월에 테오도라 왕거린은 두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남편의 선교 사역을 이어받았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언니이자 첫 여성 선교사로 활동하던 샤펜버그가 건강 악화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펜버그는 1919년 1월에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 재림교회 요양병원에 입원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12월 19일에 주님 품에 잠들게 되었다. 남편을 잃고 언니마저 잃은 테오도라 왕거린은 가족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한국 선교를 위해 더욱 힘썼다.

  1919년 5월에 개최된 조선합회(Chosen Union Mission) 제1회 총회에서 테오도라 왕거린은 안식일학교부 서기로 임명되었다. 이 부서는 원래 그의 언니였던 샤펜버그가 담당했었지만, 그녀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동생인 왕거린 여사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이었다. 2년 후인 1921년에는 교육선교사로 활동하던 하워드(Howard M. Lee, 이희만) 목사가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일시 귀국함에 따라 그녀는 청소년부 서기도 맡게 되었다. 테오도라 왕거린은 1924년까지 안식일학교부 서기와 청소년부 서기를 겸직했다. 그러다가 1925년 4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4회 총회에서 다시 선교지로 복귀한 하워드 리 목사가 청소년부 서기를 맡게 됨에 따라 그녀는 안식일학교부 서기만을 전담하였다. 테오도라 왕거린은 1939년 4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11회 총회에서 한국인인 오영섭 목사가 안식일학교부 서기로 임명될 때까지 21년간 그 직책을 맡아 안식일학교 사업을 위해 봉사했다. 그리고 1933년 2월에 개최된 조선합회 제8회 총회에서 가정봉사부가 신설되었는데, 그녀는 안식일학교부 서기 외에 새로 신설된 가정봉사부 서기로도 임명되었다. 가정봉사부 서기로서 그녀는 재림교인 가정들을 바람직한 가정생활로 이끌기 위해서 『가정 교과』를 출간했다. 그 외에도 그녀는 「시조」와 「교회지남」에 그리스도인 가정과 관련된 기사들을 꾸준히 게재하였다.

  테오도라 왕거린은 언니 샤펜버그의 사역을 이어받아 시조사의 편집장으로도 봉사했다. 1919년에 미국으로 돌아간 샤펜버그를 대신해서 편집장을 맡은 인물은 어커트(E. J. Urquhart) 목사였다. 그러나 그 역시 1923년에 안식년을 맞이해 돌아갔기 때문에 공석이 된 편집장의 자리는 테오도라 왕거린 선교사에게 맡겨졌다. 그녀는 어커트가 돌아와서 편집장을 다시 맡을 때까지 4년 동안 그 임무를 수행했다. 1928년부터 편집장을 맡았던 어커트는 1932년 2월에 서선대회(West Chosen Conference)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또다시 공석이 된 편집장의 자리는 테오도라 선교사에게 위임되었다. 그녀는 1939년까지 시조사 편집장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그녀가 1939년까지 수행한 직책은 안식일학교부 서기와 가정봉사부 서기, 그리고 시조사 편집장 등이었다. 편집장으로서 테오도라는 재림교회 공식 월간지인 「시조」와 「교회지남」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그녀는 “가정사역”과 관련된 많은 기사를 그 잡지들에 게재했다. 특히 그녀는 엘렌 화이트의 서적들을 번역하는 일에 집중하여 여러 서적을 번역 출간하였다.

  1940년에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자 대총회는 한국에서 활동하던 모든 선교사들에게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로 인해 1940년 11월부터 선교사들이 철수하였는데, 테오도라 왕거린은 1940년 12월 10일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후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되자 미국으로 돌아갔던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하기 시작했다. 테오도라 왕거린은 1947년 6월 26일 한국에 돌아와서 시조사 편집장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녀는 귀국하자마자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1947년 10월 20일부터 「시조」를 재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밖에도  여러 서적을 번역 출판했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테오도라 왕거린이 했던 가장 주목할만한 일은 예언의 소리 성경통신학교를 조직한 것이었다. 그녀는 미국에 있는 동안 이 사업에 주목하고 영어로 된 성경통신과목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 후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게 되자 그녀는 곧바로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녀의 노력에 의해서 1948년 1월에 성경통신학교가 조직되었고 본격적으로 이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녀와 성경통신학교 직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첫해에 1,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과정에 등록하였고, 1949년 3월 19일에 380명이 수료하였다. 이 사업은 한국 재림교회의 선교 활동에 큰 활력이 되었다.

  성경통신학교 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1950년 6월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테오도라 왕거린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6월 27일 오후 2시 비행기로 일본으로 피난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시조사 편집진들을 일본 요코하마로 불러들여 안식일학교 교과와 성경통신학교 교재, 「시조」 등을 계속해서 출판했다. 그렇게 출판 사역과 성경통신학교 사역에 전념하던 그녀는 1952년 6월 중순에 은퇴를 맞이했다. 그녀는 1909년에 남편과 함께 한국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42년 후인 1952년 6월에 선교 사역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귀환했다. 그녀가 한국에 체류해서 사역을 한 기간은 한국 재림교회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긴 기간인 36년에 달했다.

  미국으로 영구 귀국한 그녀는 캘리포니아에서 말련의 생애를 보냈고, 1978년 3월 19일에 캘리포니아주 레딩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참고자료] Adventist Review, April 13, 1978; Review and Herald. November 25, 1909; April 21, 1910; July 17, 1910; December 29, 1910; September 4, 1911; October 5, 1911; March 14, 1912; May 16, 1912; August 26, 1915; July 19, 1917; November 29, 1917; Year Book of the Seventh-day Adventist Denomination: The Official Directorie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09; 「교회지남」, 1919년 6월호; 1921년 6월호; 1925년 7월호; 1925년 9월호; 1933년 3월호; 1933년 9월호; 1937년 7월호; 1939년 6월호; 1941년 2월호; 1947년 10월호; 1949년 5월호; 1950년 2월호; 1951년 12월호; 1952년 7월호; 김재신. 『한국기독교 문화의 일 연구』. 서울: 공익문화사, 1969.; 오만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선교100년사』. 서울: 시조사, 2010;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서울: 선명문화사, 1968.